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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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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그리고 기록 80년 민주화의 봄과 함께 타오른 5.18 민주화운동의 불꽃같은 기억을 주요 국가기록을 통해 찾아보고 오늘의 기억으로 남겨본다. ≪광주사태 수습≫은 광주시에서 생산하거나 계엄사·내무부·도청으로부터 접수한 문서로, 계엄포고문 제10호가 공포된 5월 17일부터 광주사태 피해복구신청접수를 마감한 7월 18일까지 약 2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군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배포된 각종 경고문·호소문과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진입하기 직전, 유혈사태와 민심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생산된 지시문 등을 통하여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광주시가 인적·물적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생산한 각종 지시문, 보고서 등의 주요한 행정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긴박했던 광주의 기억(5. 17. ~ 5. 24.)

경고문
△5월 일자미상, 계엄군이 배포한 <경고문>
‘일부 고첩과 불순분자들이 여러분 대열에 끼어 폭도화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소탕전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며 시민들이 군중으로부터 이탈하여 가정, 직장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계엄포고문
△5. 17. <계엄포고문>
제10호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시행됨에 따라 정치적 목적의 집회가 금지되고 전국대학이 휴교 조치되었다.
내무공무원 복무자세 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문

◁5. 18. 내무부장관은 <내무공무원 복무자세 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문>(제6호)을 시달하고, ‘모든 지방행정 및 경찰관서에서는 이번 계엄확대에 관한 정부의 조치가 성공적으로 이룩될 수 있도록 계엄군 지원에 전행정력을 지원 협조하는 한편 국민계도 활동을 강화 어려운 난국을 군관민이 호흡을 같이 하여 슬기롭게 타개’할 것을 당부하였다.

▷5. 18. 12:05 광주시장은 군수(郡守) 등에게 관내로부터 이탈하지 말고 근무를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5. 19. 광주시장은 시산하 단체에 대하여 계엄당국의 협조요청이 있을 시 계엄사무에 협조하되, 사전에 그들의 신분을 확실히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1. 전남북 계엄분소장 육군중장 윤홍정은 광주시민에게 즉시 귀가하고 질서회복을 위해서 합심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1. 계엄분소는 각 구청과 동사무소에 대하여 ‘데모대에 식사를 제공하지 말것이며, 제공자에 대해서는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1. 오전 10시 시청 회의실에서 본청 계장급 이상 간부 및 구청 동장, 과장급 이상 간부의 긴급 확대간부회의 참석을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1. 광주시는 5. 25. 자로 모든 구, 동직원에게 정상근무를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2.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취임직후 광주일대를 시찰하고 ‘난동자는 소수에 불과, 모든 시민들은 소수 폭도에 휩쓸리지 말고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 달라'고 호소하였다. ▷5. 22. 광주시장은 80만 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50만장을 배포하고, 각 구청, 동사무소 직원에게 24시간 비상근무를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수습 관련 기록물

◁5. 23. 광주시장은 동직원에게 사상자·부상자 가정방문 위문과 5명 이상으로 구성된 동단위의 자위대(自衛隊)를 편성하여 약탈행위를 예방 조치할 것을 지시하였다.

▷5. 24. 계엄군은 ‘무기를 금일 12시까지 국군통합병원에 자진 반납할 시에 불문에 붙인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5. 24. 17:10 광주시는 25일자로 동직원의 정상근무를 지시하였다.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 시도(5. 25. ~ 5. 27.)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 시도 관련 기록물
△5. 26. 12:00 광주시장은 외곽주둔(상무대, 주월동, 동운동 방면) 계엄군이 시내로 접근함에 따라 불안·공포로 인한 민심의 동요가 예상되므로 이를 방지하고, 더 이상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엄사와 학생측을 설득하라고 지시하였다.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 시도 관련 기록물
△5. 26. 22:00 전남도지사는 광주시에 비상근무체제와 함께 광주, 목표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14명에 대한 소계를 명령하였다.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 시도 관련 기록물

◁5. 27. 계엄사 협조지시. ‘군 작전 업무 수행으로 막대한 지장이 있으니 주민들은 일체 귀가하라’는 내용으로 동사무소 옥상방송을 실시하였다.

▷5. 27. 광주시장은 20사단 62연대장 이병연 대령에게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무기 M1 29정, 칼빈 125정, 수류탄 28개를 인계하였다.

▷5. 27 광주시장은 각 구청에 구호복구상황실을 설치, 24시간 근무를 명하고, 구, 동 단위별 인명과 재산 피해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여 피해상황 파악에 노력하였다. 광주시로 들어오는 여객, 화물열차가 30일부터 정상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5. 28. ~ 7. 18.)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 관련 기록물

◁5. 28. 11:10 계엄사 정영식 대위, 최영순 문관은 화내동 사무소 방문하여 15통장 개발위원 1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
‘공수부대 광주진입은 잘못되었다.
폭도라는 용어를 금지시켜 달라.
광주사태이후 수습시까지 모든 사항은 사실대로 발표해 달라.
계엄군의 시내진입은 잘되었다.
연행중인 학생은 관용을 바란다' 등의 여론을 청취하였다.
같은 날 14:00 동구에 주둔하던 계엄군 40명이 서울이동을 위해서 철수하였다.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 관련 기록물

◁5. 29. 14:00 계엄군은 소요사태 수습을 위한 계엄협의회를 개최하였다.

▷6. 4. 14:30 광주시는 광주사태 연행자 109명을 훈방 조치하였다.

▷6. 7. 광주시는 광주사태에 대한 행방불명자 조사를 지시, 8일까지 각 구별로 행불자 명단을 보고받았다.

▷6. 9. 계엄군은 주민계도용으로 <5. 17 전국비상계엄의 배경>이란 책자를 제작, 각 읍면동에 배포하였다.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 관련 기록물
△6. 12. 광주시는 사태 수습에 기여한 공무원과 민간인을 유공자로 선정하여 표창을 수여하였다.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 관련 기록물
△6. 14. 전남북계엄분소장은 <지역내 일부 인사에 대한 계몽당부>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오도하는 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계엄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시내진입에 성공한 계엄군과 사후처리 관련 기록물

▷7. 18. 전남지사는 19일자로 광주사태 피해복구 작업을 완료할 것을 지시,
이후에는 피해신고나 보상신청을 접수·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