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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반격기 상황도

1950.9.15 ~ 1950.11.25

(지도)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반격기 상황도

(사진)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는 UN군과 국군(1950), CET0047911(2-1)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는 UN군과 국군(1950), CET0047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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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징병 입대 신체검사 모습(1951), CET0034176(4-1)

징병 입대 신체검사 모습(1951), CET003417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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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국군 단속과 범법 군인 조사 처벌에 관한 건(1951), AA0000304(0001)

국군 단속과 범법 군인 조사 처벌에 관한 건(1951), AA000030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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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1951), CET0038256(4-1)

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1951), CET00382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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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공세가 꺾인 국군 및 유엔군은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11월 30일을 고비로 철수를 가속화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후퇴하였으며, 12월말에 이르러서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함으로써 부득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12월 14일~24일간에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이른 공산군은 12월 31일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공격을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또는 신정공세(新正攻勢)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국군 및 유엔군은 격전을 치르면서 다시 38도선에서 물러났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7일에는 평택-삼척선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다.

1월 8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한 중공군은 그 동안의 전력손실로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이를 간파한 국군 및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 남안-횡선선에 이르러 다시 중공군의 반격(제4차 공세: 1951.2.11~18)에 부딪쳤으나 지평리, 원주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3월 15일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이 여세를 몰아 3월 말에는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 때 유엔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남애리를 연하는 요지를 점령하고 중부지역에서는 철원-김화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 시점에 중공군의 다섯 번째 공세인 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로서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4개 병단 16개 군단 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병력과 북한군을 총 동원하여 4월(4.22~30)에 서부전선(개성-화천), 5월(5.16~22)에 동부전선(양구-인제)에 대해 공세를 펼쳤다. 국군 및 유엔군은 사력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였고 공산군의 공세는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15일에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때부터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띈 채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쌍방은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구-연천-철원-김화-서화-간성)에서 서로 대치하였고, 소련의 제의로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전선은 교착전 양상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