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지도
    지도

    6.25 전쟁 변화상 (좌측)

    전선의 변화 ① 38선 ② 북한군 최대 남침선 ③ 유엔군 최대 북진선 (1950. 11. 25) ④ 중공군 최대 남침선 ⑤ 휴전협정 조인 (1953. 7. 27)
    단계 진출선 진출기간
    북한군 남침기 38도선 > 함안-왜관-포항 1950. 6. 25 ~ 1950. 9. 14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 낙동강선 > 정거동-초산-
    (혜산진)청진
    1950. 9. 15 ~ 1950. 11. 24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압록강선 > 평택-제천-삼척
    > 문산-화천-간성
    1950. 10. 19 ~ 1951. 6. 23
    전선교착 및 휴전 38도선 > 판문점-철원-남강 1951. 6. 24 ~ 1953. 7. 27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전쟁 중 전선이 크게 변화된 것에 따라 시기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9. 14.)로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까지 이르렀던 시기를 말한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1950. 9. 15.~11. 24.)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만주 국경의 초산-혜산진 선까지 진격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 10. 19.~51. 6. 23.)로 중공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척 선(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한 기간을 말한다.

    넷째 단계는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 6. 24.~1953. 7. 27.)로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 2. 북한군 남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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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남침 시 상황도 (좌측)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를 상륙시켰다.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우선 전방 방어 병력만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후방 주둔 사단을 긴급히 전방으로 이동시키면서 이에 대응하였으나, 북한군은 38도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서울과 춘천, 강릉을 점령하였다.

    미 제24보병사단의 상륙정 탑승,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
    북한군이 학살한 양민모습, 공보처,
    (1950)

    그 후 국군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철수한 병력과 이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병력을 통합하여 임시로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하에 한강방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7월 3일 한강선을 돌파당하면서 평택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중부전선에서는 7월 2일에 원주가 북한군에 점령되고, 동부전선에서는 7월 4일 삼척이 점령되는 가운데 지연전을 계속하였다.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파병이 결정되고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 오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국군은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대구를 사수하라, 대통령비서실,
    (1950)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여전히 상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채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인 마산-왜관-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물러났다. 그동안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유엔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는 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유엔군의 작전지휘체제와 기반이 갖추어졌다. 이때 국군도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재편성되어 전쟁 직전의 병력 수준으로 전력을 회복하였고 최소한의 전투경험도 쌓았다.

    6·25전쟁 시 북한군이 뿌린 전단, 공보처,
    (1950)
    유엔군 낙동강 방어선 모습, 공보처,
    (1950)

    반면에 북한군은 그동안의 계속된 공격으로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어 전투력이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북한군의 공세작전이 거의 한계점에 이를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을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하고 비교적 잘 배치된 방어지역에서 전세 만회를 위한 방어태세에 임하였다.

    낙동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이른바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함안-창녕-왜관-영천-포항 선을 넘지 못하였다. 북한군은 여기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전투력에서 상대적 우세를 확보하였다. 북한군은 낙동강 선에 이르러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 3.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

    지도 지도 지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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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 및 국군의 반격 작전 상황도 (좌측)

    1950년 9월 15일 미해병 상륙개시, 공보처,
    (1950)
    아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인천 시민들, 공보처,
    (1950)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전격적으로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였고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부대인 미 제10군단은 9월 15일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그 이튿날에는 경인가도로 진출하였다. 9월 18일에는 김포를 점령하였으며 9월 19일에는 한강선에 이르러 그곳에서 도하작전을 전개,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다.

    태극무공훈장1(훈기번호 제1호 ~ 훈기번호 제200호), 총무처,
    (1950)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어 9월 16일에는 미 제8군도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약 1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9월 22일~23일에는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9월 23일 이후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유엔군은 경부방향과 호남우회로를 따라 진격하였고, 국군은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중앙선 방향과 동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서울을 90일 만에 수복하고 이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38도선 이남지역을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부터 10월 11일 사이에 군단별로 각각 38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10월 10일에 원산을, 17일에 함흥을 점령하였으며, 서부의 미 제1군단은 10월 19일에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중부의 국군 제2군단은 10월 18일 양덕을 거쳐 10월 23일에는 청천강선까지 도달하였다.

    청천강선에 도달한 국군 및 유엔군은 10월 24일에 한․만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0월 25일 국군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6·25전쟁 시 국군의 전단지, 공보처,
    (1950)
    국경선을 넘어 들어오는 중공군 모습, 공보처,
    (1950)

    국군과 유엔군은 일단 공세가 좌절된 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11월 7일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었고, 11월 24일을 기하여 다시 총공세를 감행했다. 미 제8군은 다음날 정주-운산-구창동-덕천-영원선에 이르렀으나 또 다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였고,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한 지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 4.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지도 지도 지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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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반격기 상황도 (좌측)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공보처,
    (1950)

    38여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공세가 꺾인 국군 및 유엔군은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11월 30일을 고비로 철수를 가속화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후퇴하였으며, 12월말에 이르러서는 임진강-연천-춘천--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함으로써 부득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12월 14일~24일간에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징병 입대 신체 검사 모습, 공보처,
    (1951)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이른 공산군은 12월 31일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공격을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또는 신정공세(新正攻勢)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국군 및 유엔군은 격전을 치르면서 다시 38도선에서 물러났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7일에는 평택-삼척선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1월 8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한 중공군은 그동안의 전력 손실로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이를 간파한 국군 및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 남안-횡선선에 이르러 다시 중공군의 반격(제4차 공세: 1951. 2. 11.~18.)에 부딪쳤으나 지평리, 원주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국군 단속과 범법 군인 조사 처벌에 관한 건, 대통령비서실,
    (1951)

    국군 및 유엔군은 3월 15일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이 여세를 몰아 3월 말에는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 때 유엔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점령하고 중부지역에서는 철원-김화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 시점에 중공군의 다섯 번째 공세인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로서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4개 병단 16개 군단 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병력과 북한군을 총동원하여 4월(4. 22.~30.)에 서부전선(개성-화천), 5월(5. 16.~22.)에 동부전선(양구-인제)에 대해 공세를 펼쳤다. 국군 및 유엔군은 사력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였고 공산군의 공세는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15일에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 공보처,
    (1951)

    이때부터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띈 채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쌍방은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구-연천-철원-김화-서화-간성)에서 서로 대치하였고, 소련의 제의로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전선은 교착전 양상을 띠었다.

  • 5. 전선교착 및 휴전

    지도 지도 지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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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교착 및 휴전 상황도 (좌측)

    거제 포로수용소의 중공군 포로,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2)

    휴전회담 기간의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전개되었다. 즉,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휴전회담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교환 문제였다.

    휴전 및 포로 송환에 관한 건, 총무처,
    (1952)

    유엔군측은 당시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공산군측은 38도선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졌다.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은 휴전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하고 휴전회담 개시 당시의 방어선을 개선할 목적으로 제한된 범위의 공격작전을 단행하였다. 10월 말까지 계속된 이 공격은 당시의 대치선에서 평균 10km내에서 치러졌는데, 좁은 지역내에서 수많은 전투가 전개되어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공산군 측은 피해가 늘고 전선이 밀리자, 10월 25일 휴전회담에 응하여 유엔군 측 안을 수용하였으며,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이전되었다. 쌍방은 그 밖의 의제도 30일 이내에 합의할 것을 전제로 하여 1951년 11월 27일 접촉선(임진강구-판문점-산명리-금성-송정-신대리-남강)을 잠정군사분계선으로 책정하였으나, 그 후 정전보장 조치 및 포로교환 협상 등 다른 의제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합의된 잠정군사분계선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1952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선은 다시 가열되어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국지전 형태의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은 불모고지전투,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수도고지전투,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 펀치볼 전투, 351고지전투 등이다. 이들 전투는 비록 제한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기는 하나 지역을 수없이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쌍방 모두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포로 폭동과 공산군 측의 세균전 공세로 협상진척이 어렵자, 10월 8일 휴회에 들어 갔다.

    판문점에서는 영어, 한국어, 중국어 총 6장의 휴전서약서 서명, 유엔사진도서관
    (UN Photo Library), (1953)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사망하자 4월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었으며 6월 8일 포로송환협정이 타결됨으로써 휴전협상의 모든 의제가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10:00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 날 22:00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후 38도선 일대의 분계선 대신에 임진강 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