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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교착 및 휴전

전선교착 및 휴전 상황도

1951.6.23 ~ 1953.7.27

(지도)전선교착 및 휴전 상황도

(사진)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1950), CET0048117(2-1)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1950), CET0048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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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휴전 및 포로 송환에 관한 건(1952), BG0000036(20-1)

휴전 및 포로 송환에 관한 건(1952), BG0000036(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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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판문점에서 UN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대표 남일 대장 사이에 휴전협정 조인(1953), CET0048202(34-1)

판문점에서 UN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대표 남일 대장 사이에 휴전협정 조인(1953), CET00482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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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회담 기간의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전개되었다. 즉,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휴전회담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교환 문제였다.

유엔군측은 당시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공산군측은 38도선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졌다.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은 휴전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하고 휴전회담 개시 당시의 방어선을 개선할 목적으로 제한된 범위의 공격작전을 단행하였다. 10월 말까지 계속된 이 공격은 당시의 대치선에서 평균 10km내에서 치러졌는데, 좁은 지역내에서 수많은 전투가 전개되어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공산군측은 피해가 늘고 전선이 밀리자, 10월 25일 휴전회담에 응하여 유엔군측 안을 수용하였으며,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이전되었다. 쌍방은 그 밖의 의제도 30일 이내에 합의할 것을 전제로 하여 1951년 11월 27일 접촉선(임진강구-판문점-산명리-금성-송정-신대리-남강)을 잠정군사분계선으로 책정하였으나, 그 후 다른 의제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합의된 잠정군사분계선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1952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선은 다시 가열되어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국지전 형태의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은 불모고지전투,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수도고지전투,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 펀치볼 전투, 351고지전투 등이다. 이들 전투는 비록 제한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기는 하나 지역을 수없이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쌍방 모두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사망하자 4월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었으며 6월 8일 포로송환협정이 타결됨으로써 휴전협상의 모든 의제가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10:00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 날 22:00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후 38도선 일대의 분계선 대신에 임진강 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