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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인류 역사에 빛나는 기록문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기록이 세계가 인정하는 유산이 되었습니다.
  • 기록, 유산이 되다

    우리나라 세계기록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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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상 자막 ]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4대 사고는 조선 전기 신록을 보관하던 곳인데 성주, 충주, 춘추관 등 3개 사고가 전소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만은 의병의 끈질긴 저항으로 무사했다. 그러나, 왜군은 제육진을 전라도 심장부인 전주로 진격시킬 예정이었고 전주사고마저 전소의 위기에 처하자. 하지만, 5월 말부터 전운이 감돌자 전라감사 이광을 비롯해 최철견, 권수, 홍기상, 윤길, 유인, 이정란 등이 모여 왜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신록과 태조의 어진을 산속으로 옮기기로 한다.
    오희길, 유인, 안의, 손홍록, 김흥무, 한춘, 희목과 승려들은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 30여태, 나머지들 20여태 즉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이 830책, 기타 전적이 538책 분량을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을 동원해 7일 동안 고생해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다. 7월 1일 태조의 어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7월 14일 다시 더 깊은 비래암으로 실록을 옮겼다. 이 때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 내장산의 승려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다. 오희길은 어진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 52일, 안의 혼자 수직한 일수 174일, 손홍록 혼자 수직한 일수가 143일이었다. 이는 그들이 신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수직상체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1593년 4월,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7월 9일 정읍 현감 유탁의 주도 아래 신록은 정읍현으로 운반되고 안의와 손홍록은 배행 차사원이 되어 7월 11일 아산까지 신록을 배송한다. 아산에서 의정부로 인계된 신록은 해주로 운반되어 3년 동안 보관되다가 부본의 인쇄를 위해 1596년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강화도로 옮겨질 때까지 동행했는데 당시 안의의 나이 64세, 손흥록은 56세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강화도 마니산에 있던 신록은 평안도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로 옮겨지고, 1604년 묘향산에 있던 실록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렇게 지켜진 전주사고분 신록은 사본으로 인쇄돼 새로 세운 사고에 보관하게 됐는데 춘추관을 제외하고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마니산 등 조선신록을 깊은 산에 보관하도록 한 이유는 임진왜란 중 내장산에 신록을 보관한 것에서 착안한 신록 보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