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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중계석] 조선왕조실록, 그 숨은 이야기 - 홍보대사와 함께 하는 기특한 토크 콘서트 -

  • 등록일 : 2017.05.16.
  • 조회수 : 1,744

(최원정 아나운서) 오늘 기특한 토크 콘서트 제목이 참 기특한데 누가 지으셨는지 굉장히 기대가 되는 그런 시간이구요. 자 우리나라가 기록 강대국이다, 기록 대국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왜 그런지, 그냥 우리 얼핏 생각해보면 참 우리나라 사람들 기록 안 해 뭔가 허술해 뭐 이런 이미지가 있는데, 정말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우리나라가 기록 대국, 강대국이라고 합니다. 자, 왜 그런지 오늘 그 실체를 파헤치는 시간이 되고, 또 2016 세계기록총회가 왜 열리는지 한번 그 근원부터 살펴보도록 하는 짧지만 알찬 시간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계기록유산을 13개 보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세계기록총회가 9월 5일에 있습니다. D 마이너스, 오늘 정확히 보니까 49일이더라구요. 하지만 대략 D-50일이라 치고. 그 날을 맞아서 세계기록 문화의 정수, 조선왕조실록 그 숨은 이야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우리 세계기록유산이 13개가 있다란 말씀 드렸는데, 왜 작년에도 KBS 이산가족이 등재되고 이러면서 조금 더 관심을 많이 받았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 누가 선정을 하는 거고, 어떤 기준인지 좀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자, 먼저 우리 권영식 주무관님한테 여쭤 볼게요. 선정기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권영식 주무관) 아, 네 세계기록유산이란 유네스코가 세계적으로 가치있고 중요한 기록물을 보존 활용하기 위해서 1997년부터 2년마다 국제자문회의의 추천을 거쳐서 유네스코 총장이 지정하는 기록유산을 말합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총 13개라면서요?

(권영식 주무관) 네, 1997년도에 우리나라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이 처음으로 등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과 승정원일기, 그 다음에 고려대장경판 또 제경판하고 조선왕조의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등재가 되었구요. 2011년에는 일성록과 또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등재가 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난중일기가 등재가 되었구요. 작년이죠. 2015년에 한국의 유교책판과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이렇게 해서 총 13건입니다.

(방송인 이윤석) 아, 언뜻 듣기에도 굉장히 중요한 것들인데, 또 저 같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는 어떤 것들이 좀 기록이 되어 있는지 비교를 좀 해보고 싶어요.

(권영식 주무관) 지금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으로 등재되어 있는 기록이 총 348건인데요. 그중에 독일이 21건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친숙한 기록물이 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교향곡이 있고요. 양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이 있습니다. 네, 그리고 또 학생 여러분들이 많이 아실만한 기록물이 네덜란드의 기록물인데요. 안네프랑크의 일기가 있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안네프랑크의 일기 뭐 이런 것과 나란히 하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실 그것보다 제가 보기에는 더 가치로서는 훨씬 더. 그죠? 굳이 우리가 순위를 매기자면 훨씬 위 순위에 포진되어 있지 않았나.

(방송인 이윤석) 그러게요. 뭐 악보보다는 그래도.

(최원정 아나운서) 그렇죠. 그럼요. 방대함이나 그런 걸로 보면은.. 자, 조선왕조실록 어떤 역사서인지 간단히 소개를 받아보죠.

(이영도 주무관) 네, 저도 마이크 한번 들게 되었습니다. 많이 대중화가 되다 보니까 실록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다 아실 것 같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을 했죠. 그래서 이제 권수로는 1,800여권 되고, 글자 수는 사천구백팔십몇만자, 한 5천만자 되는 굉장히 방대한 분량으로 되어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우리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25대 왕별로 다 실록이 있는데, 퉁쳐가지고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1955년부터 58년 사이에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백산본을 가지고 영인본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 영인본을 만들 때 뚝 해가지고 묶어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 지금까지도 조선왕조실록으로 저희들이 전체를 묶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방송인 이윤석) 근데 제가 굉장히 재미있게 본 영화중에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게 이제 실록이 실종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거라고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럼 이제 실록에는 광해군이나 연산군 이런 분들은 이제 폐위된 왕이잖아요. 그런 분들도 기록이 되어 있는 겁니까?

(이영도 주무관) 아, 당연히 왕위에서 쫓겨난 왕들의 기록들도 당연히 일기로 존재를 하지요. 그래서 원래 일기로 존재했던 왕의 실록이 세권 있죠. 세 임금이 있습니다. 누구누구입니까? 우리 그 노산군일기는 나중에 숙종 때 단종으로 바뀌죠. 그래서 단종실록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 2명은 일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일기라고 해가지고 실록과 다른 게 아닙니다. 뭐, 체제나 거기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들은 실록과 똑같은 형태로 기록이 됩니다. 근데 저희들이 굉장히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일기가 굉장히 재미가 있습니다. 나중에 이제 뒷부분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실록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 과정을 거치겠죠. 그래서 처음 실록을 만들기 위해서 초안을 쓰고, 그걸 초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중초를 쓰고. 정초를 써서 마지막에 인쇄를 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광해군일기는 인쇄를 못합니다. 제가 샘플을 하나... 참고로 바닥에 놓았다 해서 값어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복제를 한 것이다 보니까. 멀리서 잘 안 보이시죠. (문서 가리키며) 이게 중초입니다. 중초라는 것은 마지막을 위해서 막 날려 썼겠죠. 완전히 이 뭡니까.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이죠, 그냥. 그리고 이렇게 한 것을 가지고 그 다음은 정초를 합니다, 정초. 정초는 나름대로 뭡니까. 깔끔해지죠? 그리고 나면 뭘 하겠습니까? 인쇄를 하겠죠.

(최원정 아나운서) 아, 인쇄본은 확실히 다르네요.

(이영도 주무관) 인쇄본은 확실히 달라지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인쇄를 하고 나면 앞의 것들은 다 고유명사로 '세초'라고 해서 다 없애버립니다. 근데 유일하게 광해군일기만 이 중초와 정초가 남아 있습니다. 그 중초를 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돈이 없어가지고.
인쇄를 하려니까 국가 재정이 없어 안 되겠어. 광해군일기는 일기라서 그냥 갖다 둔 게 아니라. 인조 때 한참 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그대로 중초와 정초를 보존하게 되는데, 그게 또 유일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방송인 이윤석) 네,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니까 훨씬 더 이해가 빠르고, 특히 한상효 연구관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실록의 편찬자를 사관이라고 하잖아요. 당시 사관은 어떤 분들이 선발된 거예요? 이런 분들이 사관인 거예요? 연구사님 이런 분들이요, 네?

(이영도 주무관) 저희는 사관이 되려니까, 저희 가문에 흠이 좀 많아서... 조선시대의 사관들은, 실록을 남기는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사관입니다. 요즘 우리 현대 사회에서 기록을 관리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관들이 사초라는 기록을 남깁니다. 그래서 이 사초가 뭡니까? 나중에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가 됩니다. 이 사관 같은 경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로지 기록만 남기는 전임사관, 그리고 다른 일을 하면서 사관의 역할을 하는 겸임사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전임사관이 가장 핵심적인 기록들을 남기는데, 이 앞에 보이는 사초에 가장 큰 문책은 뭔고 하니까 즉필입니다. 즉필. 보고 듣고 있는 그대로 적는.

(최원정 아나운서) 왜 요즘 기자들 따라다니면서 막 쓰잖아요. 혹은 컴퓨터로 막 치잖아요. 그거잖아요 지금? 말 위에서도 쓰고 이랬다면서요?

(이영도 주무관) 예, 맞습니다. 왕이 어디 가던가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근데 사관의 임무가 기록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요즘으로 말하면 논설 비평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평을 내요, 평을. 그 시대를 평을 내요. 일반적으로 사관은 직책이 낮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관들이 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아니고. 그런데 이렇게 직책이 낮은 사관들이 기록을 남기고 평을 하는데, 놀래요. 저도 읽다 보니까 예를 들면 명종 때, 명종이 아마 조금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요. 13살인가에 왕위를 계승받는데, 왕이 어리니까 누가 나부댑니까? 외척들. 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도? 옛날에도. 그러다 보니까 사관이 기록을 남깁니다. 대대로 외척이 이렇게 나부대니까 국사를 그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딱 남깁니다. 더 재밌는 것은 여러분, 명종 때 보면 도둑이 성행해, 우리가 대표적으로 아는 임꺽정, 이런 도둑들이 전국을 성행을 합니다. 이러니까 사관이 딱 글을 한 자 씁니다. 사신 왈, 사관이 말하기를 도둑이 도적놈들이 이렇게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때문이다. 그리고 수령의 가렴주구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청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원정 아나운서) 이야~ 할 말은 하는 언론, 야~ 멋진데요.

(방송인 이윤석) 역시 7, 8, 9급이 무섭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실록에 숨겨진 재미있는 이야기들 듣는 시간인데요. 권영식 주무관님께서 좀 몇 가지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영식 주무관) 네, 짧게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좀 있긴 한데요. 예전에 조선시대에 세 쌍둥이를 낳으면 임금님이 하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보면 세 쌍둥이를 낳아서 쌀하고 콩을 열 석을 하사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재미있는 내용은 세종실록에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가 죽고 한 아이만 살은 거예요. 그래서 임금하고 신하가 논의를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지급해야 할 것인가. 근데 임금님은 '그래도 열 석을 줘야 한다, 다 지급을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지만, 승지의 반대로 결국 쌀 오 석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방송인 이윤석) 음, 아쉽게 됐네요.

(최원정 아나운서) 나름 할인 지급이...

(권영식 주무관) 네, 할인 지급이 됐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좀 특별한 휴가가 있었는데요. 세종 8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종대왕이 너희가 직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독서할 겨를이 없다.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마음껏 책을 읽어라 라는 너무 멋진! 네, 복지 대왕이라고 세종대왕을 부르기도 합니다. 예, 그래서 세종 때 실시되었던 독서 휴가제가 계속 연이어지는데요.
기록에 보면 세종 때 실시되었던 독서휴가제가 이제 영조 때까지도 이어지는데요. 한 320명 정도 신하들이 독서휴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근데 이 독서휴가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하고 정말 책을 읽었을 때 나라발전에 기여할 만한 그런 신하들만 임금이 지정해서 줬습니다.

(방송인 이윤석) 욕심 안 내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일본이 선물을 코끼리를 했는데, 상당히 그게 좀 곤혹스러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권영식 주무관) 아, 네, 실록에 보면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그런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태종 11년에 일본 국왕으로부터 코끼리를 선물 받게 되는데요. 이 코끼리가 처음에는 사복시에서, 말이나 가축을 관장하는 그런 관서인 기관인 사복시에서 기르도록 왕이 명령을 했는데요. 사고를 치게 됩니다, 코끼리가. 코끼리를 구경을 왔던 이전에, 지금으로 말하면 국토교통부 장관쯤 되는 공조전서를 지낸 이우라는 분이 오셔서 코끼리를 보고 진짜 못생겼다, 처음으로 코끼리를 보니까. 그리고 막 화를 내면서 침을 뱉었다고 해요. 놀리면서. 코끼리한테. 코끼리도 화가 나가지고 밟아서 그 이우를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살인사건이 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이 코끼리가 신하들이 사람까지 죽이고 정말 많은 식량을 먹으니까 얘를 전라도에 있는 장도라는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방송인 이윤석) 아~ 귀양 가서 어떻게 잘 지냈습니까?

(권영식 주무관) 네, 코끼리가 귀양을 갔는데, 사복시에서 나름대로 잘 보호를 받고 있다가 섬에 가서 제대로 누가 잘 보호를 못하니까 풀, 식량을 잘 먹지 못하고 해서 수척해지고. 또 이 코끼리가 사람만 보면 눈물을 흘린다고. 이렇게 전라도 관찰사가 그런 보고를 왕에게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보고를 받은 왕이 또 마음이 짠하잖아요? 그래서 아 그럼 이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내 보내라. 이렇게 또 명령을 하게 됩니다. 다시 코끼리가 육지로 오게 됐죠. 그런데 이 코끼리가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육지에 와서 있었던 전라도 관찰사가 몇 년 지내다 보니까 계속 먹는 게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왜 우리 전라도에서만 이 코끼리를 기르냐. 충청도랑 경상도에서도 돌아가면서 길러야 된다.

(최원정 아나운서) 무슨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서로 맡아라, 맡아라.

(권영식 주무관) 네, 이렇게 보고를 올리니까 또 왕이 그것도 그렇다, 그래서 이 코끼리를 충청도로 보내게 됩니다. 근데 충청도 공주에서 이 코끼리가 있었는데요. 1년 뒤에 또 보고가 올라옵니다. 코끼리에게 먹이를 줬던 공주의 한 노비가 코끼리 발에 채여서 또 죽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죠. 그래서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코끼리를 기르는 데에도 이렇게 힘들고, 근데 얘가 사람까지 죽였으니 이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보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또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들은 인제, 왕이 바뀌었어요, 그 사이에. 세종이 얘를 섬으로 다시 보내야 되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그래도 마음이 좀 안됐던지, 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좀 보내고 병들어서 죽게 하지 말라 이러한 기록이 코끼리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이게 실록에 다 있던 애기에요 지금~ 할머니가 전해주시면 전래동화가 아니라.

(방송인 이윤석) 네, 사람뿐만 아니라 코끼리까지 이렇게 자세히 적어놨을 줄은 몰랐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네, 근데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을 열심히 보관했는데, 이게 또 한번 영영 소실될 뻔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한상효 주무관) 예, 중종33년인데요. 1538년이에요. 성주사고가 완전히 소실돼요. 그래서 태조부터 연산군일기가 잿더미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제 조사를 해보니까 관노 종말이 아들하고 사고 사각 위에서 비둘기가 자고 있는데, 그거 잡아먹으려고 이제 횃불 들고 그물 치다가 불똥이 창문 틈에 떨어져요. 그래가지고 바람이 일어가지고 그때 사고도 싹 타고 이제 안에 있던 실록도 다 타게 돼요. 그래서 이제 춘추관 사고에 있던 실록을 다시 필사해서 다시 봉안하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근데 이제 뭐, 뭐니 뭐니 해도 실록이 이제 임진왜란 때 다 소실됐죠. 조선 전기 4대 사고에 있는 것 중에 유일하게 전주사고본만 남고 나머지 실록은 다 소실되니까 뭐 가장 큰 실록의 피해는 임진왜란 때 있었다고 봐야 됩니다.

(방송인 이윤석)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불행 중 다행이고, 정말 고마운 일인데, 전주사고가 어떻게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숨겨진 뭔가 스토리가 있을 것 같거든요.

(한상효 주무관) 예, 그 고바야와키라는 장수가 전주를 공략하려고 할 때 고경면 의병이 일단 지체를 시켰어요. 그리고 이제 전주 부윤하고 전라감사하고 오희길, 그때 경기전 참봉이었어요. 지금 9급이죠. 경기전 참봉 오희길하고 유인한테 실록 피난의 중책을 맡겨요. 근데 이제 정읍에서, 퇴인면, 정읍 퇴인면에 사는 안의하고 손홍록 선비가 손을 들어서 내가 실록 피난을 중책을 맡겠다 이렇게 지원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이 없었으면 실록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근데 이제 감동적인 것은 그때 당시 안의 선생님이 64세, 손홍록 선생님이 56세였어요. 예, 지금은 젊은이들에 속하는데, 그때에는 엄청 연로하신 분들이셨거든요. 가솔들하고 노비들, 그 다음에 당신의 재산을 모두 실록 이안에 신경을 쓰게 된 거에요. 전부 다 거기다 바친 거죠.

(최원정 아나운서) 이럴 때 박수 한 번 치세요~ 네, 안의, 손홍록. 그 이름 저희가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네, 근데 이런 왜란도 견뎌냈고. 사실 우리에겐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시기가 있는데, 그때는 진짜 일제가 이걸 가만히 뒀어요? 우리 실록을?

(한상효 주무관) 아, 예. 이런 귀한 자료를 일제가 더 눈독을 들였어요. 그래서 이제 오대산사고본이, 그때 이제 을사늑약이 1905년에 있었고, 경술국치가 1910년이죠. 5년 사이에 이제 실록을 조사를 합니다. 일본에서. 일본이 주도적으로 실록을 조사해요. 그래서 각 사고에 있는 실록들을 중앙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해서 전부 다 모읍니다. 모아가지고, 오대산사고본이 제일 좋았어요. 교정본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인쇄본 하기 전에 수정한 교정본이죠. 교정본을 동경제국대학으로 가져갑니다, 1913년도에 가져가요. 그래서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대산사고본이 전부 다 소실돼요.
그러면서 일부 학자들한테 대출 나갔던 47권이 있어요. 그게 이제 2006년도에 돌아온 거예요.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오대산 사고 잔존본이 27책이 들어왔었고. 이번에 2006년도 47권이 들어와 가지고. 총 74권이 오대산사고본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적상산사고본은 6.25 때 미처 적상산사고본을 부산으로 피난을 못 시킵니다. 나머지 정족산사고본하고 태백산사고본은 6.25때 피난을 시키는데, 적상산사고본은 북한에서 가져갑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평양에 인민대학습당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요. 지금 정족산,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 두 개가 전해지는데요. 정족산사고본은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고, 태백산사고본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있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국가기록원,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죠?

(한상효 주무관) 조선 후기하고 비교를 해볼까요? 조선 후기 때 실록이 전부 산에 들어가 있었잖아요. 이제 현재는 전부 다 도심으로 나와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전부 다 도심에 있고요. 그게 이제 가장 큰 변화고, 그 다음에 조선 후기 때는 수호사찰, 사찰에서 서고를 관리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무원들이 서고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사관이냐라고 물으셨는데, 조선시대 때 사관들은 워낙 다양한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 일들이 지금은 다 쪼개져서 저는 보존파트를 담당하고, 여기는 편찬이나 전시 이런 파트를 담당하게 되고, 관리 쪽을 담당하게 되고. 이렇게 옛날 조선시대 사관의 기능들이 아주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여러 분야의 직종의 공무원들이 근무를 하신다고 보면 되고요. 건축자재가 또 틀리죠. 조선시대 사고는 자연적인 목재를 사고 건축물로 썼어요. 근데 현재는 콘크리트 건물로 해서 인위적으로 항온항습을 맞춥니다. 조선시대 때는 자연환경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 그 환경에서도 서책을 500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는데, 현재는 인위적인 건물에다가 온습도도 인위적으로 맞춰서, 서고 종이는 20도, 습도는 50% 맞춰가지고 공급을 해줘요. 그리고 공기도 바깥에 나쁜 공기를 필터링해서 공급을 하구요. 서울기록관 같은 경우는 하루 전기세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한 3백만원 정도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런 관리비용이 없었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시설을 관리하면서 관리비용이 많이 증가된 것을 볼 수 있고요.

(최원정 아나운서) 네, 자 알겠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어떤 일을 이어받아서 하고 있는지, 얘기 들어봤고요, 자, 저희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이유가 바로 올 가을에 세계기록총회가 있습니다. ICA라 그러는데요. 지금 아 퀴즈 내려고 했더니 나와 버렸네. 9월 5일부터 9월 10일까지 6일 동안 있는데, 자 이 기록총회에 대해 자세히 권영식 주무관님께서 브리핑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권영식 주무관) 네, 세계기록관리총회가 오는 9월 5일부터 10일까지 코엑스 일원에서 열립니다. 역대 최대 규모가 될 이번 총회에는 190여 개국이 참여를 하구요. 2,000명 정도의 기록관리 전문가가 참여할 예정입니다. 세계기록관리총회는 4년마다 개최가 되어서요. 일명 기록관리 올림픽이라고도 불립니다. 총회 기간 동안 국제회의, 특별강연, 250여 편의 학술발표, 그런 중요한 행사와 함께 기록전시회, 그리고 산업전, 그다음에 기록문화탐방,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번 총회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록문화 전통을 세계에 알리고, 또 우리나라가 IT 강국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IT 강국의 면모를 살려 디지털기록에 대한 미래의 비전도 제시하게 됩니다. 이번 서울총회가 기록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고 기록문화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그런 중요한 계기가 되도록 열심히 또 정성껏 준비하겠습니다. 세계적인 기록문화 축제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한 편의 홍보영상을 보는듯한 아주 깔끔한 멘트로, 세계기록총회 홍보대사를 저와 함께 맡고 있는 이윤석씨 앞으로 어떤 활동하실 거예요? 어떻게 널리널리 알리실 거예요?

(방송인 이윤석) 아, 일단은 우리 세계기록총회가 끝날 때까지는 아프지 말아야겠다 이런 결심을 했고. 사실 좀 실록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1일 300 들여 가지고 항온항습에, 가끔 바람까지 쐬어주면서 관리를 해주는 걸 보니까 아 그런 요양을 좀 받고 싶다란 생각을 하긴 했는데, 어쨌거나 오늘 자리가 기록을 기록하는 자리인데. 어떻게 보면 조금 딱딱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많은 분들이 참여를 해주셔 가지고 성공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진행이 잘 된 것 같아요. 오늘 와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또 고생하시는 우리 국가기록원 공무원 여러분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끝까지 세계기록총회가 잘 마무리되기를, 제가 끝까지 참여를 해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감사합니다. 네, 우리가 흔히 서양문화예술이 참 다양하고, 고급스럽고, 이런 생각하면서 참 많이 부러움이 있었는데, 그들은 왜 뭐 하나 훌륭한 명작이 하나 있으면 계속 그 원작을 리메이크해서 계속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지금 최근에 한류며 많은 드라마, 영화, 이런 콘텐츠들이 결국은 우리의 소중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가능한 거고, 또 앞으로 정말 굉장히 다양하게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오늘, 아까 재미있는 에피소드들 굉장히 많잖아요. 이게 다 우리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의 산업이 될 수 있는 거구요. 그래서 그런 세계기록총회를 통해서 우리의 기록의 우수성을 알리고, 또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대회인 만큼 세계인들에게 또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저희 홍보대사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 여러분들께서 애써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특별히 이런 기특한 콘서트에 시간 내서 와주신 많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리고요. 조심히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방송인 이윤석) 네, 감사합니다.

(이상진 국가기록원장) 여러분, 재밌게 보셨습니까? 오늘 이렇게 훌륭한 토크콘서트, 또 세계기록총회 홍보대사 위촉을 맡아주신 두 분, KBS 최원정 아나운서님, 또 역사저널 그날에서 굉장히 위트와 유머로 어려운 역사를 쉽게 풀어가 주시는 이윤석 님께 정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박수 한 번 보내주시죠. 예, 오늘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토크 콘서트를 했습니다만, 저도 사실은 미리 자료도 검토하고 왔습니다만, 아주 이 자리에서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너무 좋은 내용이고, 또 몇 번씩 들어도 재미있는 그런 내용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이고 우리 선조들이 훌륭한 자료를 남겨주었구나 또 그래서 이 기록이 그만큼 소중한 거구나 왜냐하면 그 분들이 이런 기록 안 남겨줬으면 저희들이 지금 이렇게 재미있는 토크콘서트를 못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우리나라가 기록문화 강국으로 이렇게 13개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기록이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시는 것 같고. 아까 우리 홍보대사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기록총회가 9월에 다가와 있는데, 세계기록총회를 우리가 유치하는 것도 이런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조님들의 그런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이 여정에 우리 두 분 홍보대사께서 같이 해주시는 것이 너무나도 든든하고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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