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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록으로 보는 진보당사건 > 진보당의'평화통일론' 수사대상이 되다 > 간첩연계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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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사건의 초기 수사는 조봉암과 진보당이 북한 간첩과 연계되었고, 북한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부분이었다. 이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서울시경 사찰과 분실이 1957년 9월 2일자로 작성한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 인지보고]이다. 조봉암이 조총련계 간첩 정OO의 간첩활동을 방조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서울시경은 또 다른 간첩연계수사를 실시하였는데, 조봉암이 간첩 박OO와 접선했다는 협의에 대한 수사였다. 박OO는 1957년 북한의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무역업자로 가장하여 남하한 후 과거 혁신정치인과 접선, 혁신운동에 관여하다가 체포된 소위 1957년 12월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의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서울시경의 수사 내용에 대해 조봉암은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대부분 부인하였다. 먼저 조봉암은 정OO을 만나 진보당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설명과 일본 교포들의 상황을 들은 사실은 있지만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조봉암, [피의자신문조서(1회)], 1958. 1. 14)
간첩 박OO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가 간첩이라는 것은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당시 선거 때문에 광주에 있어서 박OO의 진보당 사무실 방문시 만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조봉암, [피의자신문조서(5회-6회)], 1958. 1. 18, 19, [자공서(自供書)], 1958. 1. 18)
한편, 전향한 남파간첩으로 특무대의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조OO는 조봉암의 북한 밀사 파견을 진술하였다. 조OO는 [구공서(口供書)](1958. 1. 17)를 통해 자신이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던 중 남한에서 조봉암이 북한에 있는 김OO에게 연락원을 밀파하여 북한요인층의 평화통일방안을 타진하여 합작하고, 진보당에 대한 북한측의 동향 등을 타진하였다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은 [피의자신문조서(9회)](1958.1.20)에서 밀사 파견을 부인하였다. 자신은 북한괴뢰 집단에 미련이 없고, 자신은 배반자이며 개인적 입장에서는 북한이 자신의 처를 죽인 원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OO는 20여세때부터 서로 왕래하는 사이였지만 정부수립 이후에는 관계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진술하였다.([진술서]1958.1.20)에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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