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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운 60년 구술영상(신태범, 박현규,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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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운 60년 구술영상(신태범, 박현규, 김석기)
  • 기증자 : 송철원
  • 2008, 2011, 2015년 106점 기증
한국 해운 60년 구술영상(신태범, 박현규,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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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해운 60년 구술영상(신태범, 박현규,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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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갔고, 가서 처음에 도착한 것이 처음에 가서는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가서
그날부터 일본군인들이 그냥 자기네 밥이여 순전히.
자기네 하라는 대로 해야되니까 그날부터 군인들이 그냥 여자들을...
거기 가니까 여자 셋이 있던데요. 미리 가있는 여자가. 그런데 우리까지 가니까 다섯이 되지않아요?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순전히 개도 아닌 취급을 해버리고 자기네 맘대로 갖고놀잖아요.
그래서 17살 나는 해에 그렇게 가갔고, 처음으로 일본군인한테 그런 일을 당했잖아.

Q)얼마동안

A)그래갔고 그날부터 계속 군인을 받아야하니까 암만 싫더라도 받아야하고,
강제로 막... 반항을 하면 때리니까, 맞으니까.
많이 맞으면 내가 손해고 코피가 쏟아지고 그랬어요. 반항하고 다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갔고 있는 것이 그게 전방이라서 거기서 한 2개월 있었을 거에요.
그때는 날짜가는것도 모르고 세상을 사는것도 모르니까 밥은 주는대로 먹고,
안주면 못먹고... 죄인들마냥 붙잡혀서 사니까 하라는대로 하고...
그래갔고 밤도 낮도 없이 자기네들이 오고싶으면 와갔고 자기네들 하고싶은대로 행동하고
거기서 그렇게 하는걸 한 두어달 있다가 아주 앞으로 또 전진해 나갔어요.
부대가 최고 전방이라서 다른데로 전진을 해서 나가는데 짐짝마냥 우리들도 같이 거기다 실어갔고
같이 그부대 출발하면 같이 우리도 따라다니고...
그렇게 해서 다른 부락으로 또 들어가갔고, 거기서 한 2개월? 그러니까 양쪽에서 한 4개월 있었는가봐요.
근데 처음에 갔던데가, 그 지명이 나중에 알았는데 북지라고 하대요. 북지각하 이건 철벽진이라고...

로맨스 빠빠.
아버지 제가 재드릴게요.
해피버스데이 투유...
아버지 이거요.
벙어리 삼룡이.
민며느리.
아 너무 탓하지 말란 말이요.

신태범(우리나라 계획조선 1차선인 ‘신양호’를 만들다)

계획조선을 하기로 해서 (?)이 나왔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배를 킬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이유를 알겠다. 이걸 한번 해보겠다.
그런 욕망이 들어서 친구인 양재원 사장한테 국민학교 4년 선배입니다만,
이야기를 하니까 당장에 좋다고 자기가 돈을 대줄테니까 이걸 추진하자.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조선 (?) 신양호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걸 막상 키려고 보니까 조선공사는 설계능력이 없습니다.
배라는 것은 한척, 한척 설계 해줘야하는데 설계능력이 없지.
그래서 제가 마침 일본 해운잡지를 보니까 해운잡지 2965년 7호인데 일본중소기업협동조합에서 제가 말한
500톤, 1000톤, 1600톤, 2000톤, 2600톤 다들 표준선이었거든.
그래서 헐값으로 반품을 한다는 기사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이거를 보고 내가 조선공사를 찾아가가지고 잘됐다.
이걸 하자 해가지고...

박현규(‘한국선급’을 출범시키다)

(?)는 제가 해운공사 해운과장 할 적에 해공사가 외국에서 배를 많이 소유했을 거 아닙니까.
노르웨이의 (?), 불란서의 BV, 여러군데의 배를 가져오는데 그거에 대한 모든 자료 이것이.
BV는 불란서 말로 되어있고, (?)는 노르웨이 말로 되어있고, ABS는 미국말로 되어있고.
(?)를 도저히 내 힘으로선 그걸 번역해가지고 지속시키려면 맞는 검사를 해야하는데 할 수 없었어.
고민을 하다가 일본이 어떻게 하고있나 봤더니, 계약하는 것이 (?).
거기서 일할 때 아 거기서 해야지 그 힘을 얻어서
(?)라는 이름으로 (?)를 만들었는데 사실 만들고 보니까 한국에 들어와서 아무도 안들어오는거에요.
들어올라 생각을 안하는거에요.
그래서 상공부에 김철수라는 조선과장이 있어가지고 그 사람한테 앞으로 사회에는 공대 나오는 거하고
해양대 나오는 사람하고 둘이 앞으로 장래가 책임질 직장인들인데 이걸 협력해야한다 어떡하느냐.
우리가 계약을 맡았는데 아무도 이 급을 안한다. 그러니까 좋다.
그래서 상공부 (?)으로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배는 의무적으로 계약에 들어가야 하고,
모든 소용품은 계약의 인증이 없으면 쓰지 못하게 하자 하는걸 상공부 (?)으로 해줬어요.
그래서 그거 때문에 계약이 살아서 유지가 된겁니다.

김석기(화물의 위험물 운송, 검사 분야를 개척하다)

제가 1974년에서 65년에 케스코 인천사무소에 내려가 가지고
78년에 사장으로 올라오기 전까지 인천사무소에서 일했거든요.
74년에 대한해운공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폭약을 50톤 싣고 간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적포검사를 좀 해달라.
막상 배에 가보니까 앞에 1번창에 화약이 한 50톤 실렸는데 화약을 어떻게 싣고,
어떻게 가야 안전한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화약에 대해서 배운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 선박안전법을 찾아보니까 딱 1페이지.
내용도 없죠. 그래서 신경써가지고 가서 도착할 때까지 한 열흘간 밤에 불안해서 잠을 못자겠더라고요.
그래서 야 이게 위험물 운송이 우리만 아니고 외국에도 있을텐데,
외국의 자료를 구해가지고 추적해서 하다보니까 일본,
미국은 대단하게 자료가 되어가지고 규정대로 나와서 엄격하게 관리합니다.
그러고 한 몇 달 있다가 이리에서 화약폭발 사건이 있어가지고 이리역을 다 엎어버렸다고.
그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빨리 종로사무실로 오라고. 큰일났다고, 규정을 빨리 만들어야겠다고.
근데 그걸 하다보니까 이게 나만 알게 아니다. 이걸 선박회사에서 좀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겠냐.
해가지고 팜플렛들을 브리핑 차트로 만들어서 해운회사마다 다니면서 위험물 선박 운송저장 규칙이 이런거다.
이런걸 가르치고 다니고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