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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증대

  • 동영상 100억불수출기념식
  • 1965년도 수출진흥 종합시책
  • 1972년 4월달 청와대 확대 회의 자료(안)
  • 1973년도 경제외교 및 수출진흥 활동방안
  • 1973년도 수출진흥 종합시책 세부 시행계획 수립
  • 1973년도 제1차 수출진흥 확대회의 각서 송부
  • 1973년도 제1차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의 대통령 각하 지시 사항
  • 1973년도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보고
  • 1974년도 상반기중 수출진흥 확대회의 보고 계획(안)
  • 1974년도 제10차 확대회의 NARRATION
  • 1974년도 제11차 수출진흥확대회의 NARRATION
  • 1974년도 제4차 수출진흥확대회의 보고 (안)
  • 1974년도 제7차 수출진흥 확대회의 보고안건(안)
  • 1975년도 3월 수출진흥확대회의
  • 1975년도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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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달 청와대 확대 회의 자료(안)

1972년 4월달 청와대 확대 회의 자료(안)
기록물 철 제목 수출진흥확대회의, 1972 (BA0881291)
기록물 건 제목 1972년 4월달 청와대 확대 회의 자료(안) (1972)

수출은 ‘공업화의 동력’ 및 ‘성장의 동력’으로 불려진다. 즉, 수출 증가가 공업 생산을 증가시켜 공업화의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경제의 이런 순환메커니즘의 작용을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수출이 처음부터 성장의 엔진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니며 산업 기반이 형성되고 제도적·정책적 노력이 성공한 이후에야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수출은 양적·질적으로 매우 보잘것 없었다. 우선 이 시기의 수출은 1949년에 7백만 달러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 다소 증가했지만 1953년에
40백만 달러로 최고 기록을 달성한 이후 감소하여 1956년 25백만 달러, 1959년 19백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수출품도 정부수립 직후에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대표적인 수출품이었고, 1951년 미국과 중석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광산물이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195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이들 제1차 산업 제품의 수출 비율은 90%에 육박하였다.

고도성장기(제1차 - 제4차) 이후 수출의 추이는 급격히 전환되었다. 1961년 41백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1964년에 1억 19백만 달러로 증가했고, 1971년에는 10억 68백만 달러, 1977년에는 100억 47백만 달러, 1979년에는 150억 56백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수출은 무려 368배 증가하였고, 연평균 성장률은 39%에 달했다. 39%라는 숫자는 2년마다 수출액이 두 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해서 그 자체가 놀라운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1962-79년간 연평균 수출 성장률이 20% 이상을 기록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하여 9개국에 불과했는데, 이 중에서 20-25% 사이에 있는 나라가 7개국이었다. 30%를 넘은 나라는 한국과 리비아 2개국 뿐이었는데, 리비아의 수출 성장률은 32%여서 한국의 수출 성장률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1)

연도별 수출금액 변화 그래프 : 1949년 7백만달러, 1956년 25백만달러, 1961년 41백만달러, 1964년 1억19백만달러, 1971년 10억 68백만달러, 1977년 100억 47백만달러, 1979년 150억56백만달러
연도별 수출금액 변화

고도성장기의 한국 수출 성장률이 세계 1위였다는 점 이외에도 한국 수출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성과를 공산품 수출을 통해 달성했다는 점이다.
1963년에 절반을 넘은 공산품 수출은 그 이후에도 계속 증가하여 1970년 81%, 1979년 90%를 기록하였다. 반면에 20% 이상을 넘은 9개국 중에서 한국과 같이 공산품 수출을 많이 한 나라는 중계무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홍콩 정도이며 리비아를 포함하여 나머지 국가는 석유, 원목 등 제1차 산업 제품을 주로
수출하였다.

고도성장기에 수출이 빠르게 증가한 이유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해서 가능하였다. 하나는 한국정부가 시장친화적 정책을 채택하여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환율은 수출보다 수입에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1965년 환율현실화 조치를 통해 수출에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게다가 수출지원방식도 특정 상품의 수입 허가권을 부여하는 간접 지원방식에서 수출과 금융 및 조세 상의 지원을 직접 연계하는 자동 지원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하나는 매년 수출 목표를 책정하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다. 1965년 2월에 처음 도입된 이후 거의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된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정부가 책정한 수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아주 효과적인 장치였다.

1980년대 이후 정부의 목표는 '성장'에서 '안정'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성장제일주의 기반 위에서 시행된 정부 지원정책은 축소 또는 폐지되었고,
수출진흥확대회도 점차 폐지되어 갔다. 수출은 성장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 변수가 아니라 민간 기업의 효율에 좌우되는 경제활동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회발전기(제5차 - 신경제)에도 고용기회의 확대를 위해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했고, 투자재원 공급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용 유지를 위해 수출은 계속
증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 연평균 수출 성장률은 12%였다.

사회발전기(제5차 - 신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1980년대 후반에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제1차 계획기부터 상정되었던 자립경제 목표는
20여 년이 지난 이때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립경제 목표가 달성된 것은 수출 그 자체의 성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었다.

(1)
최상오,『원조,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2013,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