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을 말한다. ‘6·25 사변’ 또는 ‘6·25동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한반도에서의 분단정부의 수립은 김구의 예언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분단정부 수립에서부터 이미 한반도는 내전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1948년 2월 7일의 남로당주도의 이른바 2.7 구국투쟁에서부터 1950년 6월 25일의 6·25전쟁의 발발까지 무려 10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38선에서도 연대급 이상의 병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한의 이승만은 무력증강과 전쟁에 대비한 준비도 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북한의 김일성도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 석상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1949년 3월의 모스크바 방문과 1950년 3월의 비밀 방문 등을 통해 전쟁준비를 진행하였으며, 공산화된 중국과도 긴밀히 협의하였다. 김일성은 1950년 모택동과 비밀회담을 갖고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공산혁명을 위해 참전했던 조선족 부대 약 2만 여명을 북한으로 보내주었다.
이처럼 전쟁을 위한 무력증강에 힘쓰던 북한은 드디어 1950년 3월에 스탈린의 최종 승인과 5월에 모택동의 동의를 통해 전쟁을 개시할 결정적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전쟁의 개시 이전인 1950년 1월에 발표된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의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요지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북한의 김일성과·스탈린·모택동은 중국 혁명의 성공, 애치슨 선언, 그리고 남한에서의 사태 전개(유격대 투쟁과 남조선 인민 봉기의 예상)등으로 전쟁의 조건이 성숙하게 되자 1950년 6월에 전쟁을 개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6·25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6·25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6·25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6·25전쟁"은 먼저 양측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통계를 보면 남한측은 민간인 사망 37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8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13만 여명, 부상 45만 여명, 실종 2만 여명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합치면 약 160만 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한측은 민간인 사망 40만 여명, 부상 160만 여명, 실종 68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52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9만 여명으로 합계 350만 여명에 달한다. UN군은 사망 3만 여명, 부상 11만 여명, 실종 6천 여명이며, 중국군은 사망 11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만 여명이었다.
위의 수치상으로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3천만명이라고 할 때 약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남한의 경우 일반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이보다 더 심해서 전력의 74%, 연료 공업의 89%, 야금업의 90%,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은 양 측에서 6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6·25전쟁으로 하여금 남북한에 공고한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6·25전쟁은 양측에게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와 반미이데올로기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다. 전쟁을 통해서 분단선을 제거하려던 애초의 목표는 사라졌고, 오로지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고한 분단체제만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