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야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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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의 음식

(사진)조국광복환호국민2(1948), CET0041749(5-1)

조국광복환호국민2(1948),
CET00417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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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날이었지만, 이 해방으로 엄청난 인구의 이동이 뒤따랐다. 해방은 한국을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여기저기로 방출되었던 한국인을 한국으로 귀향시키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귀향된 한국인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한 거처가 없었다. 이에 피난민들은 깡통을 엮어 만든 양철판이나 콜타르를 바른 미군 야전용 식량박스(일명 볼박스)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을 지었다. 그러나 몸 하나 누일 집은 판잣집으로 일단 장만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먹는 일이었다. 무슨 설움 무슨 설움해도 배고픈 설움만한 것이 없다. 수용소 피난민들은 정부로부터 받는 배급으로 그런대로 허기를 메울 수 있었으나 거리로 내몰린 피난민은 스스로 밥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식량난은 ‘우유죽’과 ‘유엔탕’ 같은 희귀음식도 만들어냈다. 우유죽은 분유에다 푹 삶은 보리쌀을 섞어 만든 것으로 거리의 우유죽 배급소에서 점심 때마다 배급하였다. 또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강냉이 가루죽 급식소도 있었다. 우유죽과 마찬가지로 강냉이 가루죽도 점심 한끼 거리로 배급되었고 분유가 섞여 있었다.

(사진)피난민생활상7(1950), CET0048125(8-1)

피난민생활상7(1950),
CET004812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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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꿀꿀이 죽’이라고 부르는 유엔탕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찌꺼기를 수거하여 끓여 파는 것으로 몸이 재산인 노동자들에게 영양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구수한 고깃국 맛에 배어 있는 유엔탕을 무슨 고기곰국이나 보신탕과 같은 영양식 쯤으로 여겼었고, 우유죽과 강냉이 가루죽은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에게 훌륭한 영양식이자 피난민들의 허기를 달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피난민들은 품팔이라도 구하면 다행이었다. 가장에게만 매달려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웠던 피난민들은 있는 식구대로 모조리 밥벌이 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침 저녁이 되면 깡통을 들고 나섰다. 아이들이 많은 피난민 가정은 얻어온 밥으로 배를 채울 수 있어 아이가 없는 집안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아이들의 동냥질로 굶주린 배를 한 때나마 채운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 출처
국가기록원·국립공주대학교, 기록이 있는 역사교실 제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