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영사관관계
이 기록물철은 조선총독부 총독관방 외사과에서 1932년 조선주재 각국 영사관과 주고 받은 외교관계 기록물을 편철한 것이다. 기록물들은 재경성 영국총영사관, 재경성 미국 총영사관, 재경성 소련총영사관, 재경성 중국총영사관, 재경성 프랑스영사, 재경성 벨기에 명예영사, 재경성 네덜란드명예영사 그리고 조선을 관할로 두고 있던 중국따렌(大蓮)주재 독일영사관에서 외사과에 보낸 문서와 외사과에서 각국 영사관에 보낸 문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나라별로 기록물의 분량을 보면 영국이 13건, 미국이 17건, 프랑스가 12건,소련이 15건, 중국이 8건, 벨기에가 4건, 네덜란드와 독일이 각각 1건, 그리고 일본이 9건으로서 모두 80건이다. 이 기록물철에는 각국 영사관원의 인사문제,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과 관련된 문제, 무역통상에 관한 문제, 자료 기증 및 자료조사·교환 문제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세계경제 공황과 만주사변 등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및 조선총독부의 대외정책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929년 세계경제 공황이 발발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서둘러 자국의 관세 장벽을 높이는 한편 판매시장을 획득하려고 식민지 재분할 경쟁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치열해진 열강의 대립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해 온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너뜨렸다. 국내시장이 협소하여 어느 열강보다도 경제공황의 타격을 심하게 받은 일본은 대륙침략을 통해서 경제공황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중국 대륙진출과 ‘만몽(滿蒙)의 특수권익’ 옹호를 위해서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이듬해 1월에는 상하이를 공격 점령한데 이어 3월 1일에는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일본군의 만주점령이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정부도 항일보다는 혁명세력의 타도에 열중하였다. 한편 일본은 대륙침략의 과정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민족적 갈등을 조장, 이용하였다. 즉 1931년 6월에서 7월 사이 관동군은 창춘(長春) 부근의 만보산에서 조선인 이주민을 선동하여 중국인과 충돌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나카무라(中村) 대위가 살해된 것을 구실로 현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관동군의 무력행동이 유리하도록 정세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년 9월 18일에 훵티앤, 선양성(瀋陽省) 북쪽의 남만주철도 노선이 폭파된 것을 계기로 관동군은 일제히 만주 공격을 개시, 1932년 1월에는 만주 전 지역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 게 되었다. 이 기록물철들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일본의 대외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그 일환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조선 내의 물자를 통제하여 어떻게 조선이 대륙침략을 위해 병참기지화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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