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관표관계
이 기록물철은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조선 내 외국영사관의 관원 및 그 가족의 씨명, 연령, 직업, 현주소에 대해 매월 1일 현재의 사항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외무차관 앞으로 보고한 것이다(단 1942년 11월분은 누락). 이 조사의 목적은 1941년 12월 3일부 의보통합 제4502호 <영사관표제출편(領事官表提出方)의 건>에서 “제국 외무성은 금후 생활용품 등 배급 등에 관해 참고로 삼기 위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전시하 강력한 통제정책의 일환으로 각국 영사관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조사 과정 중에 몇 가지 변동된 사항을 정리하면 우선 중화민국이 조선 내에 가장 많은 영사관을 두고 있었는데 주경성 총영사관은 1941년 12월분에 총영사 , 부영사로 되어 있던 것이 1942년 1월분부터 총영사(공사대우), 영사, 부영사로 교체·증원되어 나타나 있고, 1942년 6월분부터는 총영사관의 위치가 경성부 명치정 2정목 83번지로 변경 되어 있다. 그리고 주진남포판사처는 책임자가 1942년 1월분부터 수습영사 리우신(劉)으로 변경되었고 주부산 영사관은 1942년 4월분부터 부영사 조우지런(周濟人)으로 변경 되어 있다. 재경성 소연방영사관은 1942년 3월분부터 총영사가 이전의 치코프(L. D. Tchijov)에서 폴리앙쉬(A. S. Poliansxti)로 변경되어 나타나있고, 실제 치코프 (L. D. Tchijov)는 1942년 5월 22일 귀국하였다. 재경성 미국영사관은 총영사를 비롯한 미국인 3인이 1942년 3월 21일부로 철수하였고, 재경성 영국총영사관의 경우도 총영사 외 3인이 1942년 6월 1일 철수하였다. 이는 태평양전쟁이 점차 확대 심화되어감에 따라 일본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이 조선에서 영사관을 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 기록물철은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까지 조선 내 각국 영사관의 현황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이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중화민국·만주국·소연방·프랑스·미국·영국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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