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menu
대메뉴가기
서브가기
본문가기

권력을 향한 여섯발의 총성 그리고 그후

김창룡저격사건 개요 및 역사적의미

  • 1956년 1월 30일 아침,육군 특무부대(이하 ‘특무대’로 줄임) 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지프차를 막아선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군복 차림의 범인들(운전사 포함하여 3명)은 번호판 없는 지프차를 타고 도주했다. 김창룡은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뒤 특무대에 설치된 빈소를 찾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범인을 잡을 것을 명령했다. 특무대는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용의자들의 인상착의와, 범행에 이용된 지프차 등이 지명수배 됐다. 특무대를 비롯해 경찰과 헌병총사령부 등 각 수사기관들이 전력을 다했으나 범인을 곧바로 잡지 못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치러진 뒤에도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 특무대는 전국의 특무부대장들을 모아 수사를 진행했고,부대원들의 인사기록카드를 뒤지던 506특무부대장이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을 지냈던 허태영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특무대원들의 잠복과 감시 끝에 2월 23일 허태영 대령은 특무대에 연행됐다. 특무부대의 계속된 추궁과 추적으로 도피했던 신초식과 송용고 그리고 지프차 운전사 이유회 등이 체포됐다. 그 외 지프차를 제공했던 105범죄수사단 허병익 중위, 특무대 수사방향을 알려주고 피의자들을 숨겨줬던 육군 정병감 이진용 대령, 허태영의 집을 드나들었던 안정수 소령 등이 연행됐다. 또 사건 직후 허태영으로부터 지프차를 샀던 현직 민의원 도진희도 구속됐다.
  • 김창룡이 누구이기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대통령이 곧바로 조문 왔으며, 그의 부하였던 허태영에게 암살됐을까?
  • 김창룡은 1920년 11월 23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영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신경의 만주철도회사에서 1년 근무했다. 그 뒤 일본군 헌병대 군속으로 입대해 일본군 관동군 헌병대에서 4년 4개월간 복무했다. 관동군 헌병대에서 그는 주로 대공사찰 업무를 담당했다. 해방 후 곧바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소군정과 인민위원회의 체포였다.
  • 일제시기 경력으로 볼 때 그는 ‘친일파’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일본을 위해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했다. 사병으로 입대해 군조(중사)로 제대할 정도로 공을 세웠다. 일본군 관동군, 그것도 헌병대에서 독립운동가일지도 모르는 인물을 잡아들이고 독립운동 조직을 적발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법률 제3호)에는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에 대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법대로라면 김창룡은 결코 군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단은 과거를 묻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히려 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며 친일파를 중용했다.
  • 고향 땅에서 두 차례나‘전범’으로 잡혔다가 탈출한 그는 38도선을 넘었다. 곧바로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제5연대(부산)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가혹한 훈련을 견디지 못해 탈영했다. 그 뒤 제3연대(이리) 사병으로 재입대해 부연대장(김백일)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3기에 입교했다. 1947년 4월 19일 소위로 임관한 뒤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제1연대 정보장교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그는 군내의 ‘좌익세력 척결’에 몰두했다.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 여순사건 직후 전군 차원으로 군내에 들어온 좌익세력을 적발하기 위해 강도 높은 숙군(肅軍)을 진행했고, 그는 유감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일제 시기 관동군 헌병대의 경험과 38선을 넘었던 경력이 잘 조합된 결과였다. 1948년 12월 30일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검거와, 1949년 4월 1일 이중업(남로당 중앙간부)을 검거했다는 공적으로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 그는 ‘군내 좌익세력 척결’을 부르짖으며 많은 사람들을 수사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수사도 있었다. 1949년 10월 29일 서울시 동대문구 민보단장 고희두는 육군정보국 제3과에 연행돼 수사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검찰의 조사 결과, 고문치사였다. 당시 육군정보국 제3(방첩과)과 이등중사였던 도진희는 주범으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 받았고, 도진희의 상관이었던 김창룡은 육군본부에서 공군본부로 좌천됐다. 시련이 닥친 김창룡에게 한국전쟁은 새로운 전기였다.
  • 6.25전쟁 직후 일시 서울을 빠져나갔던 김창룡은 1950년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편성했다.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 취임해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다. 그 공으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됐다. 김창룡은 이승만의 오른팔이 됐고, 특무부대는 이승만의 친위기구이자 무소불위의 권력기구가 됐다.
  •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악수하는 김창룡-동아일보 제공
  • 원래 특무대는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이었다. 1950년 10월 김창룡은 대공 전담기구인 육군 특무부대를 창설했다.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을 만큼 신임을 얻고 막강한 기구를 가졌던 김창룡은 군내 방첩활동이라는 본래의 임무를 넘어선 영역까지 권한을 확대시켰다. 특무대는 각종 선거나 ‘족청계 제거’ 등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이승만의 독재 강화에 이바지 했다. 또 장성 임관 등 군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 시켰다. 그러한 활동 때문에 1956년 1월 30일 과거 부하였던 허태영에게 암살됐다.
  •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이 가장 신임했던 인물의 죽음이다. 이승만은, 그의 암살소식을 듣자 곧바로 빈소를 찾아오고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장례식 조사를 포함해 3차례나 담화문을 발표했다. 수 십 년 동안 독립운동을 같이 하며 ‘형님, 동생’했던 백범 김구의 빈소도 찾지 않았던 이승만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김창룡에 대한 이승만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 김창룡장례식1956.2.3
  • 김창룡의 죽음은,1950년대 한국군의 특성과 이승만 정권의 군부 통제방식으로부터 출발했다. 한국전쟁기 ‘발췌개헌’을 시도했던 이승만이 군대를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이종찬은 그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종찬은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이승만 대통령을 압박했다. 대통령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전시(戰時)에 유엔군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던 한국군의 수장으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대통령은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게 할 통로가 필요했다.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이 특무부대와 헌병총사령부(사령관 : 원용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두 기구를 통해 군대를 적절하게 통제했다. 김창룡은 누구보다도 이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허태영의 진술처럼 고급 장성들의 비위를 조사해 경무대에 보고하는 등 방첩활동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다. 김창룡 암살사건은,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군부 통제방식에 대한 군 내부의 반발이었다. 그렇기에 허태영은 시종일관 자신의 행위가 국가와 군을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노영기 (조선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