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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선족

조선족 시련기~최근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하고 승승장구하던 한인은 봉건제와 관료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목아래 20여년 간 추진된 개혁운동의 와중에 한인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56년부터 전개된 반우파운동, 1958년의 대약진운동, 1968년의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진 약 20년간의 시기에 초대 자치주 주석 주덕해를 비롯해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숙청당하거나 비판받았으며,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지식인, 학자, 기술자 등이 북한으로 망명·이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박해에 의해 한인은 중앙의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는 식의 대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산아제한정책에 한인이 중국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한 것도 소수민족으로서의 심리적 불안감에 따른 과잉충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의 폐해로부터 국민을 살리기 위해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 정치체계의 개혁을 단행하고 1980년대 초부터 연해도시를 개방하면서 산업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의 시작은 집체적 생산양식을 버리고 개개 가족이 생산을 주관하고 세금을 내게 하면서부터이다. 이 정책은 전국으로 빠르게 파급되어 1984년부터는 전 농가의 98%가 가정생산도급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생산양식에 익숙해있던 한인은 새로운 분산경영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반면 한족은 다종경영과 3차 산업을 발전시켜 두 집단 간의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연해도시를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93년 연변주의 GDP는 전국 30개 민족자치주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1997년에는 4위로, 1998년에는 5위로 떨어졌다. 재정수입도 1993년의 2위로부터 1997년의 7위로 떨어졌다. 연변경제의 저발전으로 인한 실업, 저소득, 생활수준의 저하는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과 같은 국외로의 인구이동을 유발하였다. 이농향도(離農向都)의 인구이동으로 교사와 학생의 유출이 심해지면서 특별히 농촌의 민족교육이 부실해지자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대도시로의 인구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한인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은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해외이주이다. 현재 전체 한인인구의 1/3 이상이 장기적으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경제, 교육 등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인의 해외진출은 주로 모국인 한국에 집중되어 있으나, 일본, 미국 등지에도 많은 수의 한인이 진출하였고 조선족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재중한인의 한국진출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이후에 한국에 친척이 있는 한인이 친척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계 한인들은 대략 60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계 한인들은 돈을 벌어 귀국하기보다는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거나 혹은 재입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초기의 불법체류에서 점차 합법적인 진출과 체류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 세계의 한민족 : 중국-75쪽 (1996)

    세계의 한민족 : 중국-75쪽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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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권 거주교포 국적처리 문제 전향적 검토보고(1991)

    공산권 거주교포 국적처리 문제 전향적 검토보고(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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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 개관(1993) 재생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 개관(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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