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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독립활동

주요독립활동

1929년 광주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반일시위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의 각 학교로 파급된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 학생층은 3.1운동 이후 6.10만세운동 등 국내 반일독립운동 주력을 이루어왔다. 1920년대 후반 이후 학생층은 농민.노동자계층과 함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주력군의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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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배경]

3.1운동 이후 학생운동 양상은 ‘동맹휴교’로 대표된다. 동맹휴교 발생건수는 1921년 23건, 1922년 52건, 1923년 57건, 1924년 14건, 1925년 48건, 1926년 55건, 1927년 72건, 1928년 83건 등으로 1925년 이래 맹휴는 발생 건수에서 증가일로에 있었다. 1928년 ‘민족의식 및 좌경사상에 기초한 맹휴’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역사의 교육, 학우회의 학생자치, 교내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공통적으로 내걸고 있었다.

1920년대 광주지역 학생들의 반일운동은 1924년 광주고보의 맹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광주농업학교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1928년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맹휴투쟁 여진은 다음 해인 1929년에 들어와서도 꺼질 줄을 몰랐다. 수십 명의 맹휴퇴학생들과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20여 명 학생들은 재학생들과 긴밀한 제휴를 갖고 보다 강력한 투쟁을 갖기 위한 전열 재정비를 은밀히 진행하였다. 광주고보.광주농교.광주사범의 3개교 학생들은 비밀결사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하는 등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경과 과정]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하오 나주역 출찰구를 벗어난 한일 기차통학생들의 충돌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일단의 일본인 광주중학생 후쿠다(福田) 등 수명이 같은 기차 통학생이던 광주여고보 박기옥(朴己玉).이광춘(李光春).암성금자(岩城錦子) 등 여학생들을 출찰구에서 밀치는 등 행패를 저질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와 후쿠다의 난투극이 벌어졌고, 현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난투극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인 경찰은 불문곡직하고 박준채를 힐문.구타하는 등 민족적인 감정을 자극하였다. 이후 광주시내 분위기는 대단히 긴장되어 외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명치절 기념식은 광주학생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였다.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생 수십 명과 일본인 학생들간 난투극은 광주역전은 일대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경찰은 4일 오후부터 11일까지 70여 명 학생을 구속하고 그 중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일제는 즉각 보도통제를 실시하는 등 언론보도를 금지시켰다. 이에 신간회 본부는 진상조사와 학생들 석방을 교섭하기 위하여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특파하였다.

11월 3일과 12일의 시위운동은 우선 전남도내 각 학교로 파급되었다. 목포상업학교.나주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생들은 궐기하였다. 12월 2일부터 서울시내 각 학교와 요소에 광주학생들을 격려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고, 다음해 1월 중하순경 평양.대구.신의주 등지의 학생들 총궐기와 전국 각처의 맹휴와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학생들 항일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파급되어 194개교에서 54,000여 명이나 참가하였다.

[역사적 의의]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층이 식민지하 독립운동 중추세력의 하나였음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1920년대 말 신간회운동을 비롯하여 노동.농민운동 등이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 속에서 전체 민족해방운동을 다시 한번 고양시켜주는 계기였다. 이 운동은 1929년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1930년대 춘천고보의 상록회운동, 대구사범.부산제2상업학교의 독립운동,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운동, 제2차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주동자들은 이후 청년.노동.농민운동 등을 통하여 1930년대 식민지하 민족해방운동 주역으로서 활동하였다.

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