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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독립활동

주요독립활동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일체 경비를 조달하는 방법. 독립군은 경술국치 후 만주,연해주에 근거지를 두고 조국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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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개념]

광의적인 해석은 무력으로 일제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은 물론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열단(義烈團),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 소속된 의사들과 기타 의열사들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협의의 개념은 만주와 연해주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애국투사들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독립군은 협의의 개념에 의한 인물들을 지칭한다.

[배경]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 국내에서 국권 회복을 도모하던 활동가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무력이 강화되자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실력만 갖추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대항할 수 있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서,북간도 지역에 독립군기지 개척을 계획하였다. 서간도는 류허시엔(柳河縣) 삼원포(三源浦) 및 퉁화시엔(通化縣), 북간도는 옌지시엔(延吉縣) 명월구(明月溝),왕칭시엔(汪淸縣),허룽시엔(和龍縣)의 명동촌(明東村) 등이 개척되었다. 운동가들은 국내 각지에서 한인들을 모아 이들 독립군기지에 이주케 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산업을 일으키는 한편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등 민족정신에 투철한 독립군을 양성해갔다.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서북간도의 독립군은 일제의 무력을 상대로 일단의 무력투쟁을 실천할 만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독립군들도 있었으나, 독립군기지에서는 새로운 독립군단들이 연이어 조직되었다. 독립군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연해주에 출병해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매각한 것을 확보한 셈이다.

[군자금 확보와 사용]

필요한 자금은 연해주,만주와 국내 동포들의 군자금으로 헌납한 민족 혈세(血稅)로서 충당하였다. 조달 방법은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한인촌 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인두세나 공채 발행 등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각지에 회사나 상점 운영도 군자금 확보를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국내외 독립운동세력 거점으로 활용된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는 대표적인 경우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실시한 연통제(聯通制)도 국내 독립운동세력과 연계는 물론 군자금 확보를 위한 일환이었다. 심지어 일제 침략기관이나 은행 등에 사용할 운영비도 탈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군자금은 만성적인 부족 상황을 면치 못하였다. 더욱이 독립군의 무기 확보는 자금만 조달되면 해결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시베리아의 구입처에서 서,북간도의 독립군영까지 무기를 운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유는 중국과 소련 관헌의 엄중한 감시를 피하면서 비밀리에 무기를 거래한 뒤 운반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측의 감시와 단속이 심하여 중 · 소 국경을 통과할 때에는 뇌물에 의한 관헌의 매수가 안될 경우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의]

이처럼 군자금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물적 기반이었다. 독립군은 항상적인 총과 실탄 등 항상적인 무기 부족에 직면하였다. 군자금은 극한 상황에서도 독립군 활동을 진전시키는 요인이었다. 봉오동전투나 청산리대첩은 국외 한인들의 정성어린 군자금 지원에서 힘입은 바가 크다. 신민부,정의부,참의부나 각종 무장독립군 활동도 군자금 모금과 맞물려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