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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체포와 수형,그리고 기록물

우리나라의 사법근대화는 1894년 갑오개혁기의 권설재판소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9년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제도는 일제에 완전히 장악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적 특수성을 갖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우리민족 대다수가 이를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강압적 치안 유지와 일상적 감시체제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경찰과 재판소, 감옥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작동하였다.

일경의 취조를 받다 - 일경의 수사와 기록물

가. 일경의 역할과 권한
1) 일경의 기능과 역할

1910년의 조선 강점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체제로 통칭되는 무단통치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 헌병경찰은 독립운동 세력의 탄압을 비롯한 치안유지기능 외에 재판소가 없는 지역의 일부 민사소송에서 판사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검사가 없는 지역에서는 검사의 역할도 수행하는 등 사법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세금징수 원조, 농업지도, 산업장려, 어업단속 등 행정업무도 수행하였고, 호구조사를 담당하여 한(韓)민족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와 요주의 인물에 대한 조사도 담당했다. 일경의 이러한 광범위한 역할수행은 식민 초기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식민체제의 빠른 이식을 위해 무력을 동반한 강제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소위 ‘문화’통치기가 되자 헌병경찰은 해체되어 보통경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헌병의 공백은 경찰조직의 확대재정비를 통해 유지되었다. 1910년대 중반 약 5천 7백 명이었던 경찰은 3.1운동 후인 1921년 약 2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경찰내 일본인의 비중을 높이고, 중요 요직을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대 재정비된 경찰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치안유지와 한민족에 대한 일상적 감시체계를 심화시켜 나갔다.

1930년대 중반, 전쟁의 확대에 따른 전시체제기에는 경제통제, 노무동원, 수송 등 우리 민족의 생활전반을 통제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도높게 진행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국방경제의 문제가 불거지자 경제경찰제도를 신설하여 물자를 통제하고 위반자를 엄격히 처벌하였다. 또한 국가총동원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중추적 역할로써 사상 탄압과 전향제도 실시, 신사참배 강요, 강연회 등을 통한 전쟁협력 행위를 강제하였다. 이와 함께 수송, 강제징용, 공출 등의 임무까지 더해, 이 시기 일경은 우리 민족의 생활전반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2) 일경의 수사권한

일경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압적 치안유지와 일상적 생활통제를 통해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일경들은 이러한 역할 수행을 위해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범죄즉결권, 강제처분권, 그리고 태형(笞刑) 등이 그러한 권한이었다.

범죄즉결권은 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범죄에 대하여 즉결심판 할 수 있는 권리, 즉 범죄에 대한 일종의 수사종결권이었다. 이 권한은 1910년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의 공포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의해 구류, 태형, 과료의 형에 해당하는 죄 등의 경우, 정식재판 없이도 처벌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해 법률전문가가 아닌 경찰의 자의적 판단으로 형벌이 집행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행정법규에 관한 사항도 즉결처분의 대상이었다는 점인데 즉각적인 처벌을 통한 행정의 신속한 처리가 병합초기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강제처분권한은 일제강점기 특수한 재판제도인 예심제(豫審制)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일본에서 예심은 사건을 공판에 회부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미리 조사하여, 범죄 성립의 확신을 얻은 경우에만 공판을 개시하도록 한 제도였다. 이를 통해 검사의 기소권 남용을 제한하고 피의자를 보호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검사나 경찰은 수사에 있어서 소환, 구인, 구류, 압수, 수색과 같은 강제 처분에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장치는 1912년 공포된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을 통해 변질 되었다. 「조선형사령」에서는 사법경찰과 검사에게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는데 그 행사의 기준도 ‘긴급을 요한다는 자의적 판단’이 있으면 가능했기 때문에 남용의 소지가 매우 컸다.

한편, 태형은 1912년 공포된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에 의해 가능했다. 이 법령은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할 사람 등 경범죄에 대해 태형, 즉 곤장(棍杖)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규정한 전근대적 법령이었다. 또한 처벌 대상을 조선인으로 한정시키고, 비공개로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태형을 가장한 ‘합법적인 고문’이 가능하였다. 이 법령은 1919년의 3.1운동을 기화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는 경찰이나 검사의 신문(訊問)조서가 공판에서 증거력을 갖는 문서로 인정되어, 고문에 의한 거짓자백 강요가 일상화되었다.

위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일경은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당시 검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일경의 자체 수사 비중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나. 일경의 수사와 기록물
1) 수사절차

수사란 소추기관인 검사 및 그 보조기관인 사법경찰관리가 공소(公訴)의 제기 및 공소의 실행을 위해 사건을 수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공소준비의 수속이다. 수사는 대개 단서의 포착, 수사착수 및 종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수사의 단서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법령으로써 그 종류를 한정할 수 없고, 현행범의 목격은 물론, 고소, 고발, 자수, 풍문, 익명의 신고, 투서, 신문 기사 등을 모두 수사의 단서로 할 수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밀고, 불심검문 등에 의한 단서의 포착도 많았다고 한다.

수사의 착수는 포착된 단서가 공소를 제기할 만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피의자의 소재를 파악하며, 필요한 경우 신문(訊問), 압수, 수색, 감정(鑑定)등 강제처분권을 동원하여 사건을 조사한다

일련의 절차를 걸쳐 수사가 종결되면 사법경찰관은 일정한 처분을 해야 한다. 사법경찰관은 신문을 통해 유치가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석방하고 그 반대이면 48시간 이내에 서류 및 증거물과 함께 신병을 지방법원 검사국 또는 지청 검사분국 등에 송치해야 했다. 만약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고, ‘긴급을 요한다’고 판단될 경우 10일 간 유치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기간 내에 서류 및 증거물과 함께 피의자의 신병을 소속 지방법원 검사국이나 지청 검사분국의 검사 등에게 송치해야 했으며, 즉결처분이 가능한 범죄는 이를 즉각 시행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2) 주요 기록물

수사단계에서 작성해야 하는 필수 기록물로는 신문조서, 압수수색조서, 검증조서, 상소장, 고소장, 고발장, 변호인 선임계, 자수장(自首狀)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청취서, 범죄시말서, 도난계의 부차적인 문서도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각종 조서라고 할 수 있다. 조서에는 피의자, 증인, 통역인 등에 대한 신문조서와 압수, 수색조서 등이 있다. 신문조서는 먼저 이름, 나이, 직업, 주소, 본적지 등을 물어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사건의 내용과 혐의내용을 고지하고 신문과 진술 내용을 기재하여 이를 다시 들려주고 다른 점이 있는지 확인하여 서명날인 하는 것으로 끝낸다. 조서는 읽어 들려주는 것을 마치면 진술자가 의식의 명료함을 상실하여 질문이 불가능해도 그 조서는 무효가 아니었으며, 진술자의 서명날인은 그 조서를 읽어 주었다는 내용보다 앞에 있건 뒤에 있건 유효하였다. 진술자가 서명날인을 거절하거나 또는 이를 할 수 없는 경우는 그 사유를 기재하도록 했는데, 진술자가 문맹이 아니면서 문맹이라고 답할 경우 성명을 대서하게 하여도 불법이 아니었다고 한다.

검증, 압수, 수색의 조서는 연월일과 장소, 시각 등을 기재해야 하는데, 장소가 여러 곳일 경우는 현장에서 꼭 작성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며, 장소를 기재하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압수처분이 있을 경우, 그 품목을 조서에 기재하거나 별도로 압수(압류)목록을 작성하여 조서에 첨부해야 하며, 조사, 처분을 한 사법경찰관 또는 검사가 서명날인을 하였다.

원래 소송에 관한 서류는 모두 법원 서기가 작성해야 하지만, 사법경찰관에게는 따로 서기가 없었기 때문에 각종 조서는 사법경찰관 스스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진술내용의 자의적 해석이나 강압은 일경의 취조단계에서 일상적이었으며, 위에 언급한 것처럼 신문조서가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 상황하에서 강압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