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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아시아경기 - 아시아경기대회

이승만대통령내외분마닐라올림픽선수1차접견시선물받음

CET0024543(4-1) 이승만대통령내외분
마닐라올림픽선수1차접견시선물받음

제3회아시아경기대회파견선수단환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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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아시아경기대회파견선수단환영식

제4회자카르타아시안게임입장식관련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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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자카르타아시안게임입장식관련사진

1951년 3월 뉴델리에서 거행된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11개국이 참가했다. 경기종목은 육상·수영 등 6개 종목이었고, 총 참가 선수도 500여명에 불과했다. 한국은 아시아경기연맹 창립과 아시아경기대회 창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했으나 제1회 대회에는 6.25전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1954년 5월에 열린 제2회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에 한국은 단장 이상백, 총감독 정상희 등 임원 22명과 59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이 대회에서 최윤칠과 최충식은 2년 전 헬싱키올림픽경기에서의 패배의 쓴잔을 씻어버리듯 육상 1,500m와 10,000m를 석권했고, 최윤칠은 5,0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하여 장거리 종목을 모두 휩쓸었다.

1958년 5월 24일부터 6월 1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한국선수단은 힘찬 모습을 보여 주었다. 도쿄대회 한국선수단은 이상백을 단장으로 임원 24명, 선수 119명 등 143명으로 구성되었다. 육상과 구기 종목 등 총 14개 종목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8개, 은메달 7개, 동메달 12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3위를 했다. 역도경기에서 이장우가 플라이급에서 첫 금메달을 따내 개회 벽두부터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수많은 재일동포 관중에게 감격을 안겨주었다. 육상에서는 멀리뛰기의 서영주가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했는데, 이 기록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왔던 일본을 제치고 달성한 것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복싱의 김기수는 17세의 소년복서로 웰터급을 제패함으로써 아시아 복싱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로써 김기수는 후일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62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18개국 1,527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렸다. 그런데 개최국인 인도네시아가 대회 개시 직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아시아경기연맹 가맹국인 이스라엘과 대만에 ID카드를 발행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항의로 국제육상경기연맹과 국제역도연맹은 “육상종목과 역도종목에 참가하는 선수는 제명하겠다”는 경고 조치를 취했다. 결국 한국선수단은 이 경고 조치를 받아들여 육상과 역도를 제외한 10개 종목(수영·축구·농구·배구·권투·사이클·레슬링·사격·탁구·필드하키)에만 선수를 파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금메달 4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하여 종합 6위에 해당하는 성과를 올렸다.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66년 태국 방콕에서 18개국 2,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 14개 종목 181명의 선수단과 차기대회 유치단까지 합해 300여명을 파견했다. 한국선수단은 복싱에서 5체급을 제패하고, 탁구·역도·사격·사이클 등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경기 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차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유치에도 성공했다. 반면에 기본 종목인 육상과 수영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14개 종목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인 39명이 출전한 육상의 트랙과 필드 전 종목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건진 것이 전부였다. 수영에서도 남녀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고, 다이빙에서만 동메달 2개만 따는데 만족해야 했다.

제5회방콕아시안게임관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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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방콕아시안게임관계사진

박정희대통령아시아경기대회파견선수단접견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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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아시아경기대회
파견선수단접견악수

제7회아시아경기대회파견한국대표선수단결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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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아시아경기대회
파견한국대표선수단결단식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도 1970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방콕에서 거행되었다. 원래 이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우리 정부의 완강한 반대로 1968년 4월 20일 KOC가 AGF총회에서 위약금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반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제6회 방콕아시아경기에 임하는 우리 선수단의 각오는 어느 때보다도 남달랐다. 그 결과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18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 등 모두 54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당초 목표대로 종합순위 2위를 달성했다. 특히 제6회 방콕대회는 남자농구와 축구에서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제패를 실현한 뜻 깊은 대회이기도 했다.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74년 9월 1일부터 16일까지 16일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AGF 가맹 26개국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참가했다. 이 때 처음 참가한 나라는 북한·중국·바레인·이라크·쿠웨이트·라오스·몽고 등 7개국이었다. 테헤란 대회는 이처럼 북한·중국 등 아시아 공산국가와 아랍 국가가 대거 참가함으로써, 아시아 경기대회로서는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룬 대회였다. 테헤란 대회에 한국은 15개 종목에 참가했고, 대회사상 처음으로 참가한 북한도 15개 종목에 참가하여 국내외에 관심이 집중되는 대회였다. 결과는 한국이 금메달 16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15개를 획득하여 일본·이란·중국에 이어 4위를 했고, 북한은 금메달 15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17개로 한국에 이어 종합성적 5위를 했다. 이 대회에서 조오련은 수영자유형 1,500m에서 아시아의 신기록으로 지난 대회에 이어 2연패했고, 400m에서도 은메달을 추가해 ‘아시아의 물개’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78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12일간에 걸쳐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당초 파키스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개최 예정국에서 반납함에 따라 방콕에서 개최권을 인수하여 제5회와 제6회에 이어 또 다시 세 번째로 대회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변은 제7회 대회부터 참가한 중국·북한·아랍권 여러 나라들이 결속하여 이제까지 30여 년간 전통을 이어온 아시아경기연맹(AGF)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기구인 아시아스포츠최고회의(The Supreme Council for Sports in Asia : SCSA)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기존의 AGF 회원국인 대만과 이스라엘을 축출하고, 중국 및 아랍 국가를 주축으로 한 아시아스포츠계의 새로운 기구를 탄생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다.

아시안게임사진(양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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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사진(양궁)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경기 면에서 상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스포츠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17개 종목 267명의 선수단을 출전시킨 한국은 금메달 18개, 은메달 20개, 동메달 31개로 일본·중국에 이어 종합 3위를 했다. 특히 이 대회에 처음 참가한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17세의 김진호 선수가 아시아 최강인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고, 이 대회에 처음 채택된 볼링경기 남자개인 종합에서 안병구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올렸다.

제9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82년 11월 19일부터 12월 4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33개국 4,5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전을 벌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 20개 종목 280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승마 외의 전 종목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은 축구와 요트를 제외한 18개 종목에서 금메달 28개,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하여 한국선수단의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사상 가장 많은 메달을 따냈다. 특히 복싱은 한국 팀이 7체급을 석권하여 출전선수 전원이 금메달을 따 내는 이변을 연출했고, 테니스에서도 여자단체, 남자복식, 여자복식, 혼합복식에서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테니스의 밝은 미래를 예약해 놓았다. 이 대회에 나타난 특기 사항으로는 아시아경기대회 종합순위 8연패의 일본을 제치고 중국이 AGF 가맹 8년 만에 아시아스포츠 최강국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정주영KOC위원장제9회뉴델리아시안게임참가선수단귀국환영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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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KOC위원장제9회뉴델리아시안게임
참가선수단귀국환영악수

’86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열린 제11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90년 9월 22일부터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7개 회원국 6,0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제11회 베이징 대회는 외교사적으로도 의미있는 대회였다. 우리 정부는 사회주의 정권이 중국대륙에 들어선 이후 45년 동안이나 한국과의 외교를 단절한 채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중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베이징대회 조직위원회 측에 ’86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대회의 대회운영경험과 전산운영기술, 도핑검사기술 등의 대회 관련 기술들을 전수 내지 지원했다. 이로써 베이징대회에서는 개·폐회식 행사에서부터 경기운영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울대회의 운영프로그램과 운영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중국은 기존관계와 달리 이 대회 기간 중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호를 「한국 : Korea」로 사용함으로써 양국 간의 공식관계 수립을 향한 진일보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시안게임선수단

CET0011592(10-1) 아시안게임선수단

김대중대통령제13회방콕아시아경기대회참가선수단초청오찬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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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대통령제13회방콕아시아경기대회
참가선수단초청오찬간담회

‘아시아의 하모니’를 표방하며 개최된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는 대회 사상 처음으로 수도가 아닌 지방도시 히로시마에서 1994년 10월 16일부터 개최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 대회에는 구소련에서 분리 독립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브르느메니스탄·키르키즈스탄·타지키스탄 등 5개국이 아시아지역에 편입되어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히로시마대회는 대회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기가 벌어졌다.

제13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98년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은 대회 종목 36개 중 우슈·카바디·가라데 3종목을 제외한 33개 종목에 70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선수단은 28개 종목에서 메달을 따냈고, 그중 금메달이 22개 종목에서 고르게 나왔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육상·수영 등 기본종목에서 절대적인 열세가 예상되었지만 일본을 무려 금메달 13개 차이로 따돌리고 종합 2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