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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경기 - 올림픽경기대회

한국선수단이 동계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최된 제5회 대회부터였다. 1947년 6월 20일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한 이후 최초의 올림픽대회였다. 1948년 7월 28일부터 8월 14일까지 개최된 런던하계올림픽보다 6개월 앞선 대회였다. 이 대회에 한국선수단은 정(鄭)월타 단장과 최용진 감독의 인솔로 이효창·이동성·이종국 등이 참가했으나 워낙 경기력의 차이가 커서 입상은 하지 못하고 참가에 의의를 두는데 그쳤다.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린 제6회 오슬로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한국선수단은 1956년 1월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서 거행된 제7회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김정연 단장의 인솔로 장영·김종순·편창남·조윤식 등 4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나 이번에도 입상권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이후 1984년 제14회 사라예보대회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출전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했다.

박세직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위원장 Faire Well 이한캐나다대사접견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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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직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위원장
Faire Well 이한캐나다대사접견담화

한국은 1988년 2월 13일부터 28일까지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제15회 동계올림픽대회에 5개 종목과 1개 시범종목에 46명(임원 18, 선수 28)이라는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88서울하계올림픽을 앞 둔 대회여서 온 국민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도 메달이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500m에서 배기태가 5위, 같은 종목인 여자 500m에서 유선희가 40초 92라는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면서 13위를 차지하여 빙상단거리 종목에서의 메달 획득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시범경기로 실시된 쇼트트랙에서 한국선수단이 획득한 2개의 금메달은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김기훈이 1,500m에서, 이준호가 3,000m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제16회 동계올림픽대회는 1992년 2월 8일부터 23일까지 16일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동·하계 대회가 같은 해에 열리는 마지막 대회였다. IOC는 동·하계 대회가 같은 해에 열림으로써 초래되는 여러 가지 부담을 해결하고자 1994년부터 동·하계 대회 사이에 2년간의 간격을 두었다. 5개 종목에 50명의 선수단이 출전한 한국은 이 대회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의 불명예에서 벗어나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내며 종합성적 10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어 동계올림픽대회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김윤만 선수가 남자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따낸 것 이외의 메달은 모두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김기훈은 남자 1,000m 개인전에서 1위, 이준호·송재근·모지수와 함께 출전한 5,000m 릴레이에서도 우승하여 2관왕에 올랐다. 이 같은 쇼트트랙의 강세를 바탕으로 한국은 동계올림픽 강국으로 떠올랐다.

노태우대통령내외분동계올림픽선수단과오찬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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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대통령내외분동계올림픽선수단과오찬참석

제17회 동계올림픽대회는 1994년 2월 12일부터 27일까지 인구 23,000여명의 자그마한 소도시 릴레함메르(노르웨이)에서 개최되었다. 67개국 3,793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이 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6위의 쾌거를 달성했다. 비록 쇼트트랙 한 종목에서 이룬 성적이었지만, 하계대회에 이어 동계대회에서도 한국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제18회 동계올림픽대회는 1998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일본 나가노에서 72개국 3,0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20세기 마지막 동계올림픽인 이 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은 금 3개, 은 1개, 동 2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9위에 오르면서 3연속 세계 10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이 대회는 72개국이 출전했으나 메달을 획득한 나라는 22개국에 그쳤으며, 금메달 1개 이상을 획득한 나라는 15개국 밖에 없었다. 한국선수단은 나가노대회에서도 쇼트트랙에서만 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종목 간 불균형의 벽을 넘지 못했다.

김영삼대통령내외분동계올림픽출전선수단오찬시기념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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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대통령내외분동계올림픽출전선수단
오찬시기념품수여

동계올림픽 4연속 10위권을 목표로 2002년 제19회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를 따내 종합 15위에 그친 채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나마 이 같은 성적도 쇼트트랙에서만 건진 결과였다. 여자부 쇼트트랙의 고기현·최은경·주민진·박혜원 등 젊은 선수들은 한국 스포츠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반면에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이 가장 유력했던 첫날 남자계주에서 김동성이 미국의 러스티 스미스에 밀려 넘어지면서 실격당해 메달계획이 무산됐다. 또한 개인전에서도 안현수와 김동성이 잇따라 넘어지거나 실격되면서 쇼트트랙 역사상 처음으로 남자부 종목 노메달이 되고 말았다.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최된 제20회 동계올림픽대회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은 남녀 쇼트트랙에 걸린 8개의 금메달 중 6개를 휩쓸면서 ‘쇼트트랙 왕국’의 명예를 다시 회복했다. 특히 동계올림픽 사상 최초의 3관왕을 두 명(안현수·진선유)이나 배출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개막 3일 만인 2월 13일 안현수와 이호석이 남자 쇼트트랙 1,500m에서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냈고, 이어서 안현수와 전선유가 나란히 3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연출해 냈던 것이다. 올림픽대회에서 어느 한 나라가 특정 종목을 계속 석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1992년 제16회 알베르빌대회에서 김기훈 선수가 쇼트트랙 1,000m 종목을 제패한 이후 계속해서 쇼트트랙 최강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는 저력을 과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