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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이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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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대국민 기록정보 서비스 및 기록문화 확산을 위해 매월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 0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2. 02월
    경로우대제 실시
  3. 03월
    한국 표준시간 변경
  4. 04월
    기록으로 만나는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
  5. 05월
    기록으로 다시보는 '가정의례준칙'
  6. 06월
    기록을 통해본 현충일 행사
  7. 07월
    헌법 제·개정개관
  8. 08월
    기록을 통해 본 광복절과 정부수립
  9. 09월
    민족대명절, 추석
  10. 10월
    겨레의 글 한글
  11. 11월
    기록을 통해 본 대학입시제도 변천
  12. 12월
    기록을 통해 본 겨울나기
본 콘텐츠는 2007. 6월 ~ 2017. 12월 개발된 콘텐츠입니다.
2011년 04월

기록으로 만나는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

문맹퇴치운동은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사람인 문맹자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모든 운동이다.

이번 달에는 ‘문맹국민 완전 퇴치 및 기호식 선거방법 일소(一掃)’를 표방했던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을 주제로 선정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국어는 일본어였고, 우리말과 글은 조선어로 불렸다. 해방 당시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는 만 12세 이상 인구 10,253,138명 중 약 78%인 7,980,902명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 글(한글)을 되찾으면서 문맹퇴치운동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떠올랐다.

문맹퇴치운동은 미군정기(1945~1948)에 1948년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실시된 경우가 있으며, 1950년대에 선거를 전후로 수립된 문맹퇴치계획에 따라 전시기에 걸쳐 지속되었고, 1960년대 초반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관한 문맹퇴치운동,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1950년 6.25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문교부 주관으로 ‘성인교육사 양성, 공민학교 성인반’ 등 성인교육에 치중되었다. 이후 문교부, 내무부, 공보처, 국방부 등 부처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범국가적인 정책사업으로 확대되었다.

문맹퇴치운동은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사람인 문맹자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모든 운동이다.

이번 달에는 ‘문맹국민 완전 퇴치 및 기호식 선거방법 일소(一掃)’를 표방했던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을 주제로 선정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국어는 일본어였고, 우리말과 글은 조선어로 불렸다. 해방 당시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는 만 12세 이상 인구 10,253,138명 중 약 78%인 7,980,902명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 글(한글)을 되찾으면서 문맹퇴치운동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떠올랐다.

문맹퇴치운동은 미군정기(1945~1948)에 1948년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실시된 경우가 있으며, 1950년대에 선거를 전후로 수립된 문맹퇴치계획에 따라 전시기에 걸쳐 지속되었고, 1960년대 초반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관한 문맹퇴치운동,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1950년 6.25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문교부 주관으로 ‘성인교육사 양성, 공민학교 성인반’ 등 성인교육에 치중되었다. 이후 문교부, 내무부, 공보처, 국방부 등 부처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범국가적인 정책사업으로 확대되었다.

휴전기인 1953년, 다음해 총선을 앞두고 문교부에서 "문맹국민 완전퇴치계획"을 수립하여 만 17세 이상 문맹자 240만명을 대상으로 1953년 11월 16일부터 1954년 4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전국 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1953)의 현수막에 게시된 “없어지는 눈뜬 장님, 자라나는 민주 대한"이라는 구호는 당시의 문맹퇴치사업 목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4년, 문교부에서‘작대기식 투표 일소(一掃) 및 완전 문맹퇴치’를 목표로 "전국문맹퇴치 5차년 계획(1954~1958년)"을 수립하고, 원안대로 5년 동안 체계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 문맹자의 기준은 ‘국민 학교(초등학교) 2학년 수료 정도의 국문해득력을 갖지 못한 자’였다. 정부는 국문교육반을 중심으로 해마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70~90일 동안 각 부처가 협조하는 범국민적 사업으로 문맹퇴치교육을 실시하였다.

문교부는 "국문독본(1954), 성인독본(1955)" 등 교육교재를 발간하고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내무부는 "학장려를, 공보부는 선전.계몽을 담당하였다. 각급 학교의 교원이 교사로 동원되었고, 학생 혹은 일반인 중에서도 교사로 선정될 수 있었다. "제2차 전국 문맹퇴치교육 실시계획안"(1954)에 의하면,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54년 3월 18일부터 40일 동안 추진한 제1차 전국 문맹퇴치 교육은 만 19세 이상의 1,972,115명의 문맹해득 성과를 이루었다. 2차 사업계획에는 만 12세 이상 문맹자 1,173,144명을 대상으로 중앙에서 동.리에 이르는‘전국 문맹퇴치 교육추진 계통도’를 조직하고 국문교육반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제히 교육을 실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국문교육반의 수강인원은 평균 30명 이상, 남녀별.연령별로 운영하며, 취학독려를 목적으로 경찰에서 ‘취학불응자 및 태만자’에 대하여 행정적 제재를 가할 수 있으머, 기관이나 개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공로자 표창을 수여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1958년에는 국토방위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하여 군 입대 예정 문맹 군인들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국문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 문맹퇴치사업은 해방 당시 약 78%에 달했던 문맹률을 1960년에 28%로 낮추는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문맹퇴치운동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문맹퇴치운동, 대학생들의 농촌계몽활동으로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1950년대의 문맹퇴치운동은 한글 교육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성인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평생교육의 방향을 형성시키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거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하여 ‘기호식(작대기식) 투표방식 개선’을 목표로 내세워, "민주주의의 굳건한 기초를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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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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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000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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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명문맹 퇴치 운동
1962 녹음/동영상류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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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명문맹(초대 국회의원 선거,전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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