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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기록물

혼란의 시대에 나라를 세우다 제2호 안재홍 미군정 민정장관 문서

김인식(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안재홍의 민정장관 취임 과정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식민지시기 비타협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의 독립에 헌신하여 모두 9차례 7년 3개월의 옥고를 겪은 민족운동가였다. 8.15 광복 이후 6.25전쟁 기간 중 납북될 때까지는 민족주의 이념을 새롭게 고양하면서 ‘초계급적(超階級的)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한 정치가였다.

안재홍은 1945년 9월 24일 신민족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삼는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과도정권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목표 아래 1945년 10월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참여하였고, 동년 12월 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다. 1946년 2월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결집체였던 재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在南朝鮮國民代表民主議院)의 대표위원으로 참가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여운형·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자, 7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좌우합작 교섭의 우측 대표로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 좌우합작운동의 부산물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관선의원(官選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정치행동은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려는 종전의 정치노선에서 탈피하여, 미군정과 협력함으로써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음을 뜻하며, 민정장관(民政長官)을 수락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안재홍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력·협조 없이는 한국에 통일민족국가가 수립될 수 없음을 절감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남한 내의 정치세력들이 미군정과 협력함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미군정이 남한에서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는 조건 아래, 민정장관직은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의 형식상의 수반(首班)에 불과하였지만,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을 수행하는 기간은 그가 제한된 권력이나마 행사하던 중요한 시기였다. 결과론으로 볼 때,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을 수행함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지만, 그는 취임 전부터 이러한 결과를 예견하면서도, 스스로 ‘중앙노선(中央路線)’이라고 자부하는 신민족주의 정치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 또한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 행동이었다.

안재홍 미군정 민정장관 문서는 모두 안재홍의 민정장관직 수행과 관련된 기록들로, 민정장관 안재홍의 정치 이상과 활동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을 수락한 배경과 동기부터 검토해야 한다.

미군정은 행정권을 한국민에게 순차로 이양하겠다는 계획 아래, 1946년 9월 11일 열린 군정청(軍政廳) 각부처장(各部處長) 회의에서 군정장관(軍政長官) 러취(Archer L. Lerch)는 일체의 행정을 한국인 직원에게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인 1명이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인 민정장관과 함께 군정장관의 보좌역으로 행정운영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다. 동년 12월 13일 군정장관 대리 헬믹(G. Helmick)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인 민정장관 후보자를 물색하는 중이며, 입법의원의 추천을 받아 시급히 적임자를 기용할 작정이라고 공표하였다.

1946년 11월 군정장관 러취(Archer L. Lerch)가 치료차 동경으로 출발하면서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J. R. Hodge)에게 안재홍을 추천하면서 안재홍이 물망에 올랐다. 안재홍은 1947년 1월 말경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에게서 하지(J. R. Hodge)의 서한(書翰)을 전달받았다. 2월 3일 하지와 브라운은 안재홍과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을 초청하여 회견하면서 안재홍에게 취임을 권하였고, 안재홍은 전후 1주일을 ‘숙고집의(熟考集議)’한 끝에 2월 5일 민정장관직에 취임하겠다고 수락하였으며, 군정청 공보부는 안재홍이 민정장관에 임명되었음을 공표하였다. 미군정은 민정장관 임명을 「법령 제118호」 제5항에 따라 입법의원의 동의를 얻고자 입법의원에 동의요청서를 제출하였으며, 입법의원은 2월 7일 제16차 본회의에서 민정장관 인준건을 절대 다수로 통과시켰다. 2월 10일 민정장관 취임식이 거행되었고 안재홍은 민정장관으로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안재홍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천·관철하기 위하여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는 미국의 군정으로 하여금 민의(民意)에 가까운 정치가 되도록 협력하고, 남한의 민주주의 민족진영의 정치토대가 바로잡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라고 판단하고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사명의식은 민정장관 취임 선언문과 취임식 날 공보부에서 발표하게 한 성명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안재홍은 입법의원의 기능을 강화하고, 행정·사법 기구를 정비하고, 관기를 숙청(肅淸)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행정권을 완전 이양받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무엇보다도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민심을 이반케 하는 폐단임을 지적하고,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혔다.

민정장관 제의 및 수락 관련 문서

하지(J. R. Hodge) 중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년)
안재홍이 하지(J. R. Hodge) 중장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년)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J. R. Hodge) 중장이 한성일보 사장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 및 번역문』 (1947. 1.)은 민정장관 취임을 제의(提議)한 하지 (J. R. Hodge)  주한미군사령관의 공한(公翰)이다.

이 공한에서 하지 (J. R. Hodge)는 군정청의 중요한 직위에 적임의 인물을 선발하는 문제는, 미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잘 처리할 수 있다는 논리로,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을 수락하기를 제안하였다.

『안재홍이 하지 (J. R. Hodge)  중장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 2.)』 은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을 수락하기에 앞서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보낸 공한이다. 이 공한에서 안재홍은 자신이 민정장관직에 취임을 계기로, 행정권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되는 진척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제하면서, “직책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적절한 권한” 몇 가지를 요구하였다.

우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권한 강화를 제안하였고, 군정청 부처에 대한 민정장관의 통제권과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 군정청 부처의 조직 개편, 대중의 경제상의 행복과 관계된 문제들에 대하여 민정장관의 견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면서, 민정장관이 직접 감독하는 행정조사위원회를 설치할 필요성도 제기하였다.

안재홍은 자신의 의욕이 미군정이라는 객관조건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내외의 기대와 우려 속에서 민정장관직을 수행하였다.

민정장관 활동 관련 문서

아놀드(A. V. Arnold) 소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년)
러취(Archer L. Lerch) 소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각서(1947년)
브라운(A. E. Brown) 소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년)

『미 육군 아놀드(A. V. Arnold) 소장이 민정장관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 3. 17.)』 은 초대 군정장관을 지낸 뒤 미군 수석기획 참모부으로 전근한 아놀드(Archibold. V. Arnold)가 안재홍에게 보낸 축하 서한이다.

이 서한은 이러한 기대․우려가 모두 미군정이라는 국제관계의 객관조건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아놀드(A. V. Arnold)는 좌우합작운동으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이 개인의 친분으로 진전된 우정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충고를 담았으나, “독립을 위한 확고한 경제 기반”을 다지라는 조언에는 미군정의 시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아놀드(A. V. Arnold)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사명과 임무를 강조하고 현 입법의원이 본연의 구실을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안재홍에게 미국과 미군정에 최선으로 협력·협조하라고 당부하였다.

『군정장관 러취(A. L. Lerch) 소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각서(1947. 3. 12.)』 에서, 러취(A. L. Lerch) 소장은 안재홍에게 인사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하였는데, 군정청 안에서 인사 쇄신를 단행하려는 안재홍의 의지가 민정장관 취임 직후부터 좌절되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내외의 제한된 여건 속에서 안재홍이 군정청 내의 한국인 수반으로서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하여 그의 개성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연회를 개설하는 모습 등을 『주한미군 사령관 대리 브라운(A. E. Brown) 소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 3. 27.)』 에서 볼 수 있다. 이 서한은 31일 개최되는 연회에 브라운 내외가 참석하겠다는 답신이다.

안재홍이 민정장관직에 취임하기 전, 김구는 안재홍에게 ‘도로무공(徒勞無功)’을 염려하면서 만류하였지만, 안재홍의 노력이 형식상의 성과를 거둔 바도 있었다.

안재홍은 비록 군정 상황이지만, 행정권을 완전히 이양 받아 미군정 하의 자치정부를 실현하고, 이로써 장래의 독립국가 건설에 대비하려 하였다.

1947년 5월 17일 미군정은 민정장관 안재홍이 건의하고 군정장관 러취(Archer L. Lerch)가 인준한 『법령 제141호』 (남조선과도정부의 명칭)』 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 제1조에서는 “북위 38도 이남 조선을 통치하는 입법·행정·사법 부문 등 재조선 미군정청 조선인 기관은 남조선과도정부라 호칭함”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과도정부라는 개념과 성격이 모호하고, 실권은 여전히 미군정에 있었지만, 완전한 민정이양을 위한 남한 내의 과도기 통치기관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안재홍은 제한된 여건이었지만 남조선과도정부의 행정부 수반으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이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는 전후의 시기에 통일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이상이 좌절되고 남한단독정부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더욱 치열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정돈 상태에 빠진 1947년 8월 말 경 미국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특사로 웨드마이어(A. C. Wedemeyer)가 내한하였다.(8월 26일 내한하여 9월 3일 이한하였다. 그는 방한하기 전, 국공(國共) 내전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에 한 달간 체류하였으며, 다시 도쿄를 들러 맥아더와 회담하였다.) 안재홍은 웨드마이어(A. C. Wedemeyer)의 방한 전후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미국의 대한정책이 남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이미 돌아섰다고 정세 판단하였고, 이를 수용하면서 두 가지 방향에서 ‘시국대책’을 강구하였다. 하나는 민정장관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활용하여 미군정·미국정부를 설득하려 하였다. 또 하나는 자신이 민정장관의 지위에 있으므로 표면에서 중심에 나설 수 없었으나, 중간파의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일(민주독립당 창당과 민족자주연맹 결성)을 지원하였다.

안재홍이 미군정·미국정부를 상대한 대응책으로는 웨드마이어(A. C. Wedemeyer)가 방한하는 무렵인 8월 말부터 9월 사이의 한 달여 동안 남조선단독조치(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처할 시국대책방안을 직접 작성하여 ‘민정장관(Civil Administrator)’ 명의 또는 ‘안재홍’ 개인의 명의로 미군정과 미 행정부 요로에 보냈다.

이들 문건의 요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현실로 수용한 전제 위에서, 남한에 민주역량을 성장·강화시켜 통일민족국가를 완성하는 주도역량이 됨으로써 통일건국을 완성하자는 데에 있었다. 안재홍은, 이승만·한국민주당 계열로 대표되는 ‘극우 보수’ 세력이 장차 수립될 남한 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함을 막고, 중간우파 세력이 신정부의 주축을 이루어야만 대중들을 좌익의 유혹에서 차단하여 공산주의를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8.15 광복 후 ‘극우 보수’ 세력이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미군정을 사실상 지배하였으므로, 민중들이 군정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동조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안재홍이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중장에게 보낸
영문 공문(1947년)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중장이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년)

『민정장관 안재홍이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중장에게 보낸 영문 공문(1947. 8. 28.)』 은 민정장관의 명의로 웨드마이어(A. C. Wedemeyer)에게 보낸 공한이다.

이 공한에서 그는 미국의 반공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미국정부를 설득하려 하였다. 남한에 진정한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만 공산주의를 방지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보수극우 세력(conservative extreme right wing)’이 다시 등장하여 새로 수립될 남한 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현실을 매우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보수세력이 군정을 사실상 지배하였으므로 공산주의자들이 군정에 대항하자 대중이 이에 호응하여 좌경화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만약 새로운 정부에서 ‘보수극우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고 강하게 경고하였다. 안재홍은 중립의 정치성향(neutral political leanings)에 대중들이 모이도록 유도함으로써, 즉 중간우파 세력이 남한 정부의 주축이 되어야만 대중들을 좌익의 유혹에서 차단할 수 있으며 이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간곡하게 충고하였다.

『미 육군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중장이 민정장관 안재홍에게 보낸 영문 서한(1947. 8. 30.)』 은 위의 8월 28일자 안재홍의 공한에 대하여, 안재홍의 견해가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방한단의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는 형식상의 예우를 갖춘 내용이다. 결과론으로 볼 때, 안재홍의 시국대책 방안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웨드마이어가 이한한 지 10여 일 지난 1947년 9월 16일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더욱 분명한 현실로 다가왔다. 안재홍은 민정장관으로서 단독정부에 대응하는 ‘시국대책’의 방안을 다시 제시해야만 했다.

유엔결의와 5.10 총선거 관련 문서

『민정장관 안재홍이 작성한 “공동위원회 실패와 현재 상황에 적절한 대응책” (1947. 9. 23.)』 도 안재홍이 ‘민정장관’ 명의로 작성한 시국대책안이다. 안재홍은 이를 『미소공위(美蘇共委)의 불성공(不成功)과 시국대책』 이라는 제목의 한국문으로도 작성하여 ‘민정장관’ 명의의 성명으로 발표케 함(1947. 9. 23.)으로써 한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안도 병행하였다.

안재홍이 한미경제인클럽에서 한
영문 연설문(1947년)
안재홍이 UN 한국임시위원단 단장 메논(K. P. S. Menon)에게 보낸
영문 공문(1948년)
남조선과도정부의 영문 각서 "총선거와 그 대책"(1948년)

이 문건을 영문으로 작성한 이유를 추측하면, 23일자의 문건과 동일한 내용을 다음날인 24일 한미경제인클럽에서 연설(『민정장관 안재홍이 한미경제인클럽에서 한 영문 연설문(1947. 9. 24.)』 )하였음을 보더라도, 일차로는 이 연설의 원고로 활용되었고, 이후 미군정과 미국정부 요로에 재출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 문건은 만일 미국과 소련이 협조하지 않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고 만다면, 미국은 ‘남조선 단독조치’로 나아갈 터이므로, 남한만의 보통선거를 앞두고 민중을 진정한 민주주의 노선으로 영도하여 남조선과도정부와 협력하게 함이 중대한 국책임을 강조하였다.

안재홍은 남조선과도정부를 사실상 정부화함으로써 새 정부수립의 기틀을 다지고, 유엔의 지원 아래 새로 수립되는 남한의 정부가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주도역량(主導力量)’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구체안을 5가지로 제시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10월 완전히 결렬되자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으며, 같은 해 11월 14일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에서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독립의 방안, 한국에 유엔 임시위원단을 설치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감독하게 하는 한국통일안이 43대 9(기권 6)로 통과되었다. 12월 19일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8일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약칭 UNTCOK)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3일 뒤인 11일 서울 덕수궁에서 위원단 전체회의가 열렸다. 서울에 온 유엔임시위원단은 양 점령군 지역 사령관에게 예방의 뜻을 전했으나, 소련군은 접근조차 거부했다.

1948년 1월 23일 유엔의 소련대표 그로미코(Andrei Andreevich Gromy´ko)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어 유엔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정식으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여건 아래 유엔임시위원단은 1월 22일부터 남한의 정치지도자들만을 상대로 면담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선과도정부 정무위원회(부처장회의)는 1948년 2월 6일에 특별회의(임시회의)를 열어 『UN 한국임시위원단에게 보내는 메시지』 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남조선과도정부 각 부처장이 UN 한국임시위원단에게 보내는 메시지(1948. 2. 6)』 는 남북한의 정치·경제·사회를 비롯한 제반 상황을 근거로 삼아 “실시 가능한 지역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모든 점령지역에서 즉시 총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하고 솔직한 의견”임을 주장하였다. 『민정장관 안재홍이 UN 한국임시위원단 단장 메논(K. P. S. Menon) 박사에게 보낸 영문 공문(1948. 2. 6.)』 은 이 메시지가 남조선과도정부의 정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모든 정무위원과 민정장관 본인이 서명하여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되었음을 통지하는 서한이다.

유엔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다녀온 뒤인 1948년 2월 하순 유엔임시위원단 안에서는 물론, 유엔 소총회(Little Assembly of the United Nations)에서도 남한만의 총선거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그러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31대 2(기권 11)로 가결하였다. 이른바 ‘가능 지역 총선거안’이었다. 이에 따라 3월 1일 하지 사령관은 입법의원에서 통과시킨 선거법안을 가지고 5월 9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이후 미군정 당국은 5월 9일에 일식이 있을 수 있으므로 5월 10일로 바꾸었다).

미군정이 선거 일정을 확정하고 공표하자 안재홍은 민정장관으로서 5.10총선거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였다.

『남조선과도정부의 영문 각서(“총선거와 그 대책”, 1948. 3. 21.)』 는 민정장관으로서 총선거에 임하는 원칙과 방책을 작성한 메모이다. 이 문건은 영문으로 작성하였으므로, 미군정과 요로를 수신자로 설정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조선 서울 남조선과도정부’라는 작성만 표기되었고 수신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총선거를 주관하려는 안재홍의 구도가 담겨 있다. 원만하게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대중과 정부 간의 괴리, 특히 경찰과 대중 간의 위험한 대립”을 해소해야 하는데, 먼저 '경찰이 대중의 증오, 분노, 그리고 반대의 대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경찰 개혁을 제시하였으며, 두 번째로 ‘대중의 사회적, 정치적 교육’을 주장하였다. 안재홍은 김구를 비롯한 남북 협상론자들에게도 5.10총선거에 참여하기를 간곡하게 호소하며 총선거에 한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노력하였다.

5.10총선거는 안재홍의 구도대로 완벽하게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5월 19일 그는 5.10총선거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들이 대개 피선되었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안재홍은 이렇게 5.10총선거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하였고, 선거에 반영된 민의를 수용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첫 출발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민정장관 퇴임 성명을 발표하고, 『한성일보』 사장직을 맡아 언론인으로 복귀하였다.

안재홍은 1950년 5.30 선거 때 고향인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바로 눈앞에 두었으나, 6.25전쟁 기간 중인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기록물 소장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 http://museum.korea.ac.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