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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기록물

우리 힘으로 은행을 세우다 제11호 대한천일은행 창립 및 회계 관련 기록물

김미경(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대한천일은행 개괄

1876년 개항 이후 무역의 증가로 일본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 지점들이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이 자국 은행을 앞세워 조선의 경제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러한 일본의 금융자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경제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당시의 정부와 상인들을 중심으로 자주적 민족은행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외세자본에 맞서 조선정부는 1880년대부터 중앙은행의 설립을 시도하지만 재정자금의 부족으로 화폐발행만 전환국에 맡기게 되고, 이후에 몇 차례 시도한 중앙은행 설립은 외압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890년대 민족자본 은행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의 은행들은 영업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영업활동을 활발히 펼치지 못하여 문을 닫게 되거나 설립추진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1899년 1월 30일 상인층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황성 대광교 반청계천 북변 장통방 정만석계 1통 1호(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일대)에 터전을 잡고 민족금융을 향한 금융기반을 키워나갔다. 대한천일은행은 정부의 조세수납취급 업무 외에 상인을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확대하면서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하게 성장하여 현재 우리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1899년 창립에 이르기까지

갑오개혁 이후 정부는 중간 수탈을 방지하고 국가재정의 강화를 위해 조세수취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화폐개혁’ 및 국고금을 취급하는 ‘중앙은행의 설립’이라는 근대금융화를 추진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1897년 광무정권이 출범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광무정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출범 초기부터 고종황제의 창립자금(창립자본금의 54%)을 지원받으면서 황실은행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한천일은행의 자본금은 5만 6천 원(元)에 발행 주식수 112주(株)(주당 50원)로 정하고, 창립정관에 조선인 외에 주식매매를 할 수 없다는 제한규정을 두어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선 민족자본은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한천일은행은 자국의 지원을 받는 중국(청) 상인과 일본 상인들에 맞서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하여 조선 상인들에게 대부분 담보 없이 상업신용을 기초로 한 대출업무 지원을 통해 민족금융을 보호할 수 있었다.

대한천일은행은 광무정권과 상인층이 밀접하게 연계하여 추진한 근대금융화의 한 표본이었다. 대한제국시기 삼국 상인(조선, 청, 일본)의 상업활동이 증가하면서 서울지역에서 한전(韓錢, ‘신식화폐발행장정’ 재정으로 융통된 신식화폐)을 매개로 형성되기 시작한 삼국 상인 간의 환거래 확대는 한전(韓錢, ‘신식화폐발행장정’ 재정으로 융통된 신식화폐) 수급을 위한 금융기구를 필요로 했고,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서울지역의 유력한 상인층과 광무정권의 유대관계가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에 부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한천일은행의 설립과 경영을 통해 일본 금융자본에 대응하여 경제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주적 민족은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한천일은행 관련 주요 기록물 소개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문서 및 회계문서는 근대은행의 창립 과정과 회계처리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 국가지정기록물 제11호로 지정된 총 19건 75점의 대한천일은행 관련 기록물은 다음과 같다.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문서 : 12건 18점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문서 : 12건 18점
번호 유물명칭 시대 수량
1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 및 인가서 대한제국 1점
2 대한천일은행 정관청원 및 인가서 대한제국 1점
3 대한천일은행 인천부산목포지점 설치 청원 및 인가서 대한제국 1점
4 대한천일은행 개성지점설치 청원 및 인가서 대한제국 1점
5 대한천일은행 정관 대한제국 1점
6 대한천일은행 지점규칙 대한제국 1점
7 대한천일은행 좌목 대한제국 1점
8 대한천일은행 공첩존안 대한제국 2점
9 대한천일은행 고첩 대한제국 1점
10 대한천일은행 일기 대한제국 1점
11 대한천일은행 깃식부 대한제국 1점
12 대한천일은행 깃식과일기 대한제국 6점
합 계 18점

대한천일은행 회계문서 : 7건 57점

대한천일은행 회계문서 : 7건 57점
번호 유물명칭 시대 수량
1 대한천일은행 정일기 대한제국 32점
2 대한천일은행 장책 대한제국 1점
3 대한천일은행 회계책 대한제국 1점
4 대한천일은행 주회계책 대한제국 6점
5 대한천일은행 출납기부 대한제국 2점
6 대한천일은행 탁지부세금출납통장 대한제국 1점
7 대한천일은행 무정기임금총부 대한제국 14점
합 계 57점

1)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기록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1899년)
좌목(座目)(1902년)
대한천일은행 공첩존안(公牒存案)(1899~1902년)

현존하는 최고(最古) 기업창립문서를 비롯하여 탁지부(度支部)가 인가한 금융기관 최초 지점허가서, 황태자인 영친왕이 1대 주주로 기록되어 황실은행의 성격을 보여주는 주주명부인 『좌목(座目)』, 은행의 대외 교류 및 운영 세부사항을 알 수 있는 『공첩존안(公牒存案)』 등 창립 관련 문서(12건 18점)를 통해 대한천일은행의 설립과 주요 업무를 알 수 있다.

정부의 조세수납을 대행하고 황실의 금고 역할과 더불어 상인들을 대상으로 자금지원 역할을 하였던 대한천일은행의 주요 기록물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創立請願) 및 인가서(認可書)』와 『정관(定款)』 등에는 은행의 주요 업무가 기록되어 있다. 은행 창립 당시 정부관료 및 상인을 주축으로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의 창립청원서에는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을 창립이념으로,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국가경제발전을 목표로 한다는 은행 설립 목적의 내용이 쓰여 있다.

대한천일은행 인천부산목포 지점 설치 청원 및 인가서(1899년)
대한천일은행 정관(1906년)
대한천일은행 탁지부세금출납통장(1899~1900년)

이 문서는 근대 금융 관련 자료가 많이 전해지지 않은 가운데 유일한 국가의 은행 설립 허가서이다. 또한, 가장 오래된 기업 창립 관련 공식문서로서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이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임을 증빙하는 자료이다.

『정관』에는 조선인 외에 주식매매를 할 수 없다는 제한규정을 두어 민족자본 은행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중앙은행권 발행과 조세금 취급 역시 기록되어 있어 당시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할 수 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이 항구나 지방관청의 조세수납을 대행하고 그것을 중앙정부로 수송했던 내용을 『탁지부세금출납통장(度支部稅金出納通帳)』과 『일기(日記)』 등에서 볼 수 있다.

『탁지부세금출납통장』에서는 1899년 3월~1900년 2월까지 대한천일은행의 조세금 운송을 담당한 군현(郡縣)의 숫자와 조세금의 납부 현황을 통해 대한천일은행이 조세금 취납 업무를 전국적으로 다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세금 취급 업무 외에 ‘예금업무, 환업무, 대출업무’ 등 일반은행의 역할도 수행하였는데, 상인층을 대상으로 영업 활동을 넓히고 삼국(조선, 청, 일본) 상인과의 거래 관계를 통해 대한천일은행이 지속적으로 은행의 영업망을 확대할 수 있었다.

특히, 청나라 상인은 주로 단기의 상업자금을 융통해 주고, 일본 상인에게는 일본화폐나 은화를 담보로 백동화를 융통해 주거나 환전해 주었던 반면, 조선 상인들에게는 담보가 없더라도 상업신용에 기초한 장·단기 대출업무를 지원하고 일본의 은행에 비해 낮은 이자율을 제공함으로써 민족금융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안팎으로 은행의 조직을 정비하여 자본금을 모으고 영업기반을 구축한 대한천일은행은 설립되던 해인 1899년 최초 금융 지점인 인천지점을 설치 후, 개성지점을 연달아 설치하는 등 전국적으로 업세를 신장시켰다. 이러한 광무정권 시기 대한천일은행의 설립과 경영활동 자료가 남아있기에 이를 바탕으로 근대금융사 및 기업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대한천일은행 회계 관련 기록물

1899년 대한천일은행 설립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부기방법인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置簿法)’이 장부 정리방식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개성상인들이 창안한 송도사개치부법은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선 우리 고유의 회계 장부 정리방법으로, 이 작성법은 어떠한 재물의 이동변화라도 빠짐없이 기록할 수 있도록 금전출납 기록법과 함께 특유의 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1903년 일본에 의하여 서양식 복식회계법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고 1910년을 전후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정착되면서, 이 때 ‘개성부기’라고도 불리는 ‘송도사개치부’는 사장되어 작성법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송도사개치부법으로 기록된 대한천일은행의 회계자료는 고유의 전통 복시부기 방법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회계장부이다.

은행 창립 초창기부터 사용된 ‘송도사개치부법’은 대한천일은행 장부에서 금전출납 및 수신(돈을 받는 일)과 여신(돈을 빌려주는 일) 등의 업무를 처리할 때 사용되었다.

이 장부정리법은 상업조직이 근대적인 회사조직에,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상업부기가 근대적인 은행 회계에 별다른 무리 없이 적용되어 서양식 장부정리방법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근대 은행의 운영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한천일은행 일기(1899년)
대한천일은행 깃식과 일기(1898~1906년)

우리나라 전통 회계사 및 구한말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료가 되고 있는 대한천일은행의 회계문서 중에서 『정일기(正日記)』 - 『장책(帳冊)』 - 『주회계책(周會計冊)』으로 이어지는 복식회계시스템과 그 외 보조장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매일 돈이 들어오고 나간 내역이 기재된 『정일기』에는 대한천일은행 창립 직전인 1899년 1월 25일부터 작성된 은행기록이 기재되어, 창립과 동시에 각종 은행 업무를 활발하게 하였음을 보여준다. 일기장에 해당하는 『정일기』는 현재의 현금출납부로 『장책』의 현금계정을 대신한 것이다.

대한천일은행 장책(1899년)
대한천일은행 주회계책(1900~1905년)

『장책』은 거래처의 개인별, 기관별, 항목별 입출금 명세를 거래대상자별로 구분하여 옮겨 적은 것으로, 일기장에서 장책으로 옮겨 적을 때 일기장에는 행두에 흑점을, 확인 시에는 일기장과 장책의 금액 위, 행두에 빨간 점을 찍어 표시하였다.

장책의 내용을 근거하여 작성된 『주회계책』은 대한천일은행의 결산서로 기별 순익회계와 이익결산내역 이외에 예금주들의 내역까지 기재된 내용을 통해 이익과 손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지방의 세금을 받아서 탁지부에 인계한 것을 기록한 장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통장인 『탁지부세금출납통장』, 현재의 현금출납부에 해당하는 『출납기부(出納記簿)』, 1899~1904년까지 대한천일은행의 당좌거래내역이 기재된 『무정기임금총부(無定期任金總簿)』 등이 『송도사개치부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부기복식법으로 작성된 복식회계시스템과 관련 보조장부 등 1899년(광무 3)부터 1905년(광무 9)까지의 대한천일은행 회계문서(7건 57점)는 당시의 사회경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이며 또한, 대한천일은행의 초창기 운영기록이 담겨 있어 구한말 사회경제사의 1차 자료로써의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초창기 은행 설립과 회계 관련 문서를 통해 국가 조세금 취급 업무 외에 상인을 대상으로 '예금업무, 환업무, 대출업무'를 지원하고 우리나라 전통의 부기복식법인 '송도사개치부법'을 이용하여 장부를 표기하는 등 민족은행으로써 일반은행의 역할과 함께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및 회계문서는 근대 금융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금융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근대금융사 및 기업연구사, 사회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기록물 소장처 :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 https://www.woorimuseum.com/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