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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기록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제12호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국내외 독립운동의 전개

한국독립운동은 대한제국기에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10년대에는 국외로 확장되어 갔다. 국외 독립운동의 주요 지역은 중국의 서간도·북간도와 관내, 러시아의 연해주 등이었다.

만주 지역에는 1860년대부터 이주한 한인들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각종 학교가 설립되어 수많은 독립군 배출과 단체들이 활동하였고, 1910년대부터 중국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광저우(廣州)·톈진(天津) 등지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외에도 1905년 안창호가 미국, 멕시코 등지에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1909년 박용만이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면서 미주 지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자주적이고 독립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정치적인 방식은 크게 달랐다. 비록 서로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는 각종 ‘선언서’를 통해 한결같음을 알 수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대동단결선언』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인이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 소집을 제의한 문서이다. 이 선언의 작성자는 조소앙인데, 자전(自傳)에서 대동단결선언을 수초(手草)하였다고 하므로 그가 기초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1917년)
대동단결선언(1917년)

이 문서는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 유품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조소앙은 후일의 회고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절감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자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선언서를 발송하였다고 한다.

선언서의 발기자는 신성(申檉 : 申圭植), 조용은(趙鏞殷 : 趙素昻), 신헌민(申獻民 : 申錫雨), 박용만(朴容萬), 한진(韓震), 홍위(洪煒),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윤세복(尹世復), 조욱(趙煜 : 曹成煥), 박기준(朴基駿), 신빈(申斌) 김성(金成 : 金奎植), 이일(李逸 : 李龍爀) 등 14인이다. 발기인들은 대종교·동제사·신한혁명당과 관련이 깊은 재미인사와 중국에서 활약하던 인사가 주축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은 본문과 그에 첨부된 강령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독립운동 조직을 정부와 같은 조직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첫째, 대한제국의 주권을 계승할 정부적 조직의 결성 당위성을 국가법리론적 혹은 역사적 관점에서 논하였다. 둘째, 효율적인 독립운동 전개를 위하여 정부적 조직 결성을 통한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셋째, 만국사회당의 대의를 내세워 인류사회의 화복을 재정(裁定)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은 해외동포의 주권 행사도 천명하여 해외동포의 민족대회 개최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즉, 대한제국의 주권을 상속한 정부 조직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가의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역사적 당위이며, 현실적 이익이며, 시대의 대세에 부흥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1919년)
2․8독립선언서(191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2·8독립선언서』의 계기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앞서 1918년 11월 미국 의회에서 윌슨 대통령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2·8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하였으며, 3.1운동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3.1독립선언서 작성에 참고가 되었다.

2·8독립선언서의 집필을 마친 이광수는 1919년 1월 31일 일본 고베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미국 대통령 윌슨과 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영문으로 된 2·8독립선언서를 전문으로 보냈다.

국문으로 된 독립선언서는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국내에 반입되어 현상윤․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이 이를 받아보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가 되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고, 민족독립이 되지 않으면 일제와 영원히 투쟁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를 보아 2·8독립선언서는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러시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8독립선언서는 서두에 “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혈전(血戰)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2·8독립선언을 위해 도쿄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만든 조직으로, 일제에 대한 구체적인 투쟁계획을 추진․지도하였으며, 선언서의 작성과 등사, 독립선언서의 발송과 거사 당일의 계획을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였고, 영문과 일문으로 각각 번역하여 일본의 조야와 외국공관에 발송하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8일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위장하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과 태극기를 흔들며 도쿄 시내를 행진하기로 하였으나 일제 경찰들이 회관을 완전 포위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무장한 일경들에 대항하였고 일경들에 의해 3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적도(敵都)에서 조국 독립을 선언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양심적인 일본인들조차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뉘우치게 하였으며,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만주 지린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1919년 2월 김교헌 등 39인이 만주 지린(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 이 선언서는 1918년 ‘무오년(戊午年)’에 선포되었다고 하여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선언서의 발표일자는 ‘단기 4252년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음력인지 양력인지는 분명치 않다. 작성자는 조소앙이며, 발표의 주체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라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였다.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는 다른 선언서와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는 ‘독립군의 총궐기’와 ‘혈전독립’을 주장하는 등 무장투쟁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언서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복국(復國), 입국(立國)과 그 이후 구경(究竟)의 세 단계로 표현되어 있다.

복국 단계에서는 ①군국전제 삭제 민족평등 실현, ②무력겸병 근절 평균천하 공동 진행, ③밀약사전(密約私戰) 엄금 대동평화 선전을 제시하였다. 입국 단계에서는 ①동권동부(同權同富)를 통한 남녀빈부 제일(齊一) ②등현등수(等賢等壽)를 통한 지우노유(智愚老幼)의 사해인류(四海人類)를 제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궁극적 단계에서는 국제불의(國際不義) 감독과 우주의 진선미(眞善美)를 체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선언서의 서명자 39인은 만주·연해주, 중국 관내, 미국 등 국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로 대종교(大倧敎)와 관련되어 있었다.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사고와 정서가 비교적 충실히 반영된 선언서이며, 3.1운동 시기에 발표된 독립선언 가운데 해외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조선총독부 훈춘 파견원, 간도의 일본 경찰관, 상하이의 일본영사관이 습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어 번역문이 강덕상이 편찬한 『현대사자료』 제26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서명자 중 한 명인 ‘박용만’에 의해 1919년 영문으로 번역되어 미주 하와이에 소개되었다.

『3.1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1919년)
3.1독립선언서(신문관판)(1919년)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계속된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 기간 동안 발표된 국내외의 여러 『독립선언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것은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 별실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만세시위 발발 전에 전국에 배포되어 독립선언의 정신과 행동지침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독립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학계에서는 3.1독립선언서에 대하여 ‘보성사판’과 ‘신문관판’의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두 가지 판본이 생기게 된 이유는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조판하고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는데, 조판의 짜임이 좋지 않아 보성사에서 다시 조판하여 인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는 첫 문장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에서, 국호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글자가 바뀌어 있다.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의 제목은 『선언서』로 되어 있으며, 1919년 2월 10일 경 독립선언서의 초안이 완성되어 2월 15일 최린에게 전달되었고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맡겨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일제의 각종 생산 문서를 근거로 하여 보성사판이 2월 27일 21,000매 인쇄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자서전인 『묵암비망록(默巖備忘錄)』에 의하면, 2월 20일부터 1차 25,000매, 2차 10,000매 등 모두 35,000매가 인쇄되었다고 한다.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오수열 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작고 후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선언서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때 옆방에서 현장을 증거하고, 파고다 공원과 연락을 취하였던 6인의 청년 중 한 명인 이병헌이 『삼일운동비사』를 편찬하고 오수열씨에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보성사판과 신문관판 선언서는 단어와 국문 표기, 성명 등에서 구별된다.

이를테면 보성사판에서 ‘박상’과 ‘선창’이 신문관판에서는 ‘박탈’과 ‘선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주시경 문법을 적용하여 띄어쓰기, ‘ㄲ, ㅃ’ 등 현대문법에 가까운 형태로 표기한 데 반하여, 보성사판은 옛 문법 체계를 따라 ‘ㅺ, ㅽ, ㅼ’ 등으로 표기하였다.

기록물 소장처 : 독립기념관 ( http://www.i815.or.kr/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