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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기록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다 제3호 이승만 대통령 기록물

오영섭(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이승만 문서의 개요

이승만 문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을 지낸 이승만(1875~1965) 박사가 남긴 문서이다. 이 문서는 이승만 사후에 그의 아들 이인수 박사가 이화장에 비장(秘藏)하고 있다가 1997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이승만연구원 전신)에 기증한 것이다. 이 문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운동 및 통치활동을 파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이승만 문서는 크게 15만여 쪽의 종이문서(국가지정기록물 제3호), 1만 9천여 장의 사진(국가지정기록물 제3-1호), 수십 박스의 해외 영자신문 스크랩으로 이뤄져 있다. 이 외에도 각종 팸플릿, 도서, 잡지, 녹취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문서는 이승만이 직접 작성한 문서와 받은 문서, 그리고 제3자 간에 주고받은 문서를 이승만이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이승만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5만여 쪽의 종이문서이다. 이는 다시 1948년 8월 이전 문서와 이후 문서로 구분되는데, 그 문서 분량은 전자가 15% 정도, 후자가 85% 정도를 점한다. 이 중에서 1948년 이전 문서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활동

이승만은 191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하와이에 머물 때에는 종교, 교육, 식산, 저술 활동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펼쳤고, 국제환경이 한국독립에 유리하게 돌아가면 미국과 유럽으로 나가 미국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외교독립활동을 펼쳤다. 이 때 후자의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로서 혹은 임정이 임명한 외교대표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심혈을 다하였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바친 애국혈성은 3.1운동 관련 자료, 미주 교민단체 관련자료,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자료, 구미위원부 관련자료, 건국운동 관련 자료로 구분되는 이승만문서의 1948년 이전 종이문서와 사진자료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승만의 다양한 독립활동이 담긴 방대한 자료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흐름은 그가 자신의 특기이자 염원인 외교독립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임정을 매개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외교독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와 세 차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제1기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을 지냈고, 제2기에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파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명전권공사로 활약했으며, 제3기에 1941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세 시기에 걸친 임정 활동은 국제사회로 하여금 임정을 독립정부로 승인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이승만과 임정의 애증이 점철된 관계를 문서와 사진을 곁들여 간략히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1) 제1기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임명 신임장(1919년)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로 선임한 국민대회 선포서(1919년)

제1기에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에 올랐다. 이 중에서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를 중시하였다.

일부 망명인사들이 조직한 상해임시정부와 달리 한성임시정부는 전국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거쳐 조직한 정통성 있는 정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운동 기간은 물론 대통령 재직 기간에도 자신은 상해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성임시정부가 추대한 민족지도자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벌인 대립과 갈등의 근저에 도사린 중요 문제였다.

1919년 4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직위를 활용하여 워싱턴에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 본부를 설치하고 외교선전 활동에 들어갔다.

이 때 그는 ‘Republic of Korea’란 한국의 영문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어 6월 14일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president’로 번역하여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의 정부 수반과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여기서 1919년 4월 23일 한국 신정부(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고 한국 신정부의 독립과 유지를 후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한 통합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1919년 9월부터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당한 1925년 3월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임지인 상해를 떠나 미국에서 외교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동포들로부터 거둔 독립자금을 가지고 미국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외교 선전 위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구미위원부는 세계 외교의 중심지인 워싱턴을 무대로 전개된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을 최일선에서 담당한 준정부 기관이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1921년)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상해를 떠나기 전
행정방침을 지시한 임시대통령 유고(1921년)
임시정부 개혁안이 담긴 내외정책안(1921년)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정부청사가 있는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계속 미국에 머물렀다. 이 때 일반정무는 총리와 각원들이 상의하여 처리하고 외교사무와 중요 정무만을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이른바 역할분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요 정무들을 우편이나 전보로 처리함에 따라 시급하고 중요한 정무 처리가 지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20년 3월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대통령의 조속한 상해 부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1920년 11월 비서 임병직과 함께 중국 화물선을 타고 상해로 밀항하여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약 6개월 간 상해에 머물렀다.

상해에서 이승만은 무장독립운동 지지자인 국무총리 이동휘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의 초점은 국무총리 이동휘가 주장한 대통령제를 위원제로 변경할 것, 이승만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올린 위임통치청원을 철회할 것,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의 독립자금 전용 문제를 해소할 것 등이었다.

이 때 이동휘 등은 이승만의 사퇴를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그들의 요구를 일축하며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를 주장했다. 그는 한 때 사퇴를 고려했지만 자신을 대체할 지도자가 없다는 생각에서 대통령직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아울러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재정 및 인사 운영의 방만성을 개혁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21년 3월 이승만은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신내각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상해임시정부의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워싱턴군축회의(태평양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외교독립활동에 돌입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신내각 출범 후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을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교서를 임시의정원에 제출하고, 상해를 떠나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상해임시정부의 반(反)이승만파는 이승만을 비판하거나 탄핵할 때에 대통령의 임지 이탈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총력을 기울였다. 이 때 그는 한국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군축회의에서 한국대표에게 발언권을 주거나 본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 채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그는 자금을 들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영문 문건을 다수 제작하여 각국 대표단과 언론인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러나 군축회의 주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대표들은 한국대표단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상해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워싱턴군축회의에서 한국의 문제를 의제로 올리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상해임시정부 내 반(反)이승만파를 중심으로 이승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져 갔다. 이후 상해임시정부 내 이승만 지지자들도 반(反)이승만 대열에 속속 합류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져 1925년 3월 상해 임시의정원의 안창호파가 이승만을 탄핵 면책시키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로써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의 첫 번째 관계는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2) 제2기

국제연맹 파견 특명전권대표 신임장(1932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당시
이승만의 영문 일기(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 당시 이승만(1933년)

제2기에 이승만은 1932년 11월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파견한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당한 이승만을 외교대표로 기용한 것은 임시정부의 외교독립활동을 수행할 만한 적임자로서 이승만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이승만에게 부여된 임무는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탄원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32년 12월 미국 국무장관이 서명한 외교관 여권을 가지고 뉴욕항을 떠났다. 미국정부가 미국시민권이 없는 이승만에게 외교관 여권을 내준 것은 특별 예우를 베푼 것이다. 그는 1933년 1월 제네바에 도착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제연맹 및 그 회원국들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독립활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을 찾아갔다. 이승만이 중국대표들을 방문한 의도는 그들과 한중연대를 이뤄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연맹 총회의 의제로 직접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외교관들은 한국의 문제를 국제연맹에 직접 상정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한국의 문제를 국제연맹 총회에 직접 올려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승만은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일제가 급조한 만주국의 괴뢰성을 폭로하고 만주에 사는 100만 한인의 정치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1933년 2월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요구를 담은 공한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세계 주요 언론사 기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또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 ‘한국과 극동의 위기’란 제목으로 방송연설을 하였다. 나아가 제네바에 있는 각국의 외교관 및 언론인들과 교제하면서 동양평화의 전제조건으로써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서한발송 및 선전홍보 활동과는 별개로 이승만은 국제연맹 조사단이 일본인의 만주침공을 조사한 『리튼보고서』 의 내용을 발췌하고 여기에 자신의 논평을 가한 『만주의 한국인들』(1933. 3.)을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 책자에서 그는 박해와 탄압을 받고 있는 만주한인 문제에 대한 정당한 고려 없이 만주분쟁은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아울러 만주분쟁과 한국문제를 바로 연결시켜 만주한인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고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상과 같은 항일외교를 통해 이승만은 국제연맹이 『리튼보고서』 를 채택하고 이에 반발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1905년 8월 뉴욕에서 미국 데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을 말끔히 씻어버린 쾌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3기

한인자유대회 기념사진, 맨 뒤 중앙이 이승만(1942년)

제3기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미외교를 총괄하는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을 맡았다. 1941년 4월 미주교민사회에서 독립노선이 다른 중요 독립단체들이 모두 모여 통합운동을 벌였다. 이 때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워싱턴에 대미외교를 담당할 부서로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위원장에 이승만을 내정하고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하여 수락을 받았다. 이는 이승만이 반대파로부터도 외교독립운동에 관한 한 최고 적임자로 인정받았음을 잘 보여준다.

대미외교의 최고 책임자에 오른 이승만은 연합국을 지도하는 미국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에 필요한 외교와 선전 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1941년 여름부터 1945년 여름 경까지 대략 네 가지 방향으로 임시정부 승인 활동을 펼쳤다.

첫째, 이승만은 미국 정부 요인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 임시정부를 독립정부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반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시정부의 외교대표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 국무장관, 미국 대통령에게 계속 임시정부 승인 요구 및 촉구 서한을 보냈다. 이 때 그는 미국정부가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태평양전쟁 종료 후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공화국을 수립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치능력을 구비한 국가에 대해서만 독립을 인정해 온 관례에 따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둘째, 이승만은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승인 활동을 후원한 친한단체를 활용하였다. 그는 1942년 1월 한미협회를, 같은 해 12월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이승만과 친분을 맺은 미국사회의 유명인사들이 가담했다.

이들 단체는 이승만과 재미한인들이 주최하는 임시정부 승인 촉구대회에 참가하고, 이승만을 대신해 백악관, 국무부,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 촉구 편지를 보내고, 한국독립을 홍보하기 위한 개인 면담과 잡지 기고 활동을 펼치고, 미국 의회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셋째, 이승만은 한국청년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권을 얻으려는 참전외교를 펼쳤다. 그는 1941년 가을부터 38명의 한국청년들이 미국 정보조정국(COI)과 전략첩보국(OSS)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미군 소속으로 대일전쟁을 벌이게 하였다. 또한 재미한인 청년들로 한인자유부대를 창설하여 대일전쟁에 동원하고 광복군 수만 명을 미군에 통합시켜 대일전쟁에 투입하자는 내용의 한국프로젝트를 OSS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제안이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1945년에 납코작전과 독수리작전 한반도 침투작전에 따라 한인청년 70여 명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특공대원으로 훈련시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훈련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일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주미외교위원부협찬회 기념사진(1944년)

넷째, 이승만은 1945년 4~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립회의의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확실한 보장을 얻으려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그러자 그는 창립총회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진정서를 보내 1882년 조미조약과 1943년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립총회를 주관하고 있는 미국 국무부 내 친소련파 인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제연합 창립총회 참가가 무산되자 이승만은 미국 신문을 통해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수뇌가 제2차 대전 종전 후에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두기로 합의하였다”는 내용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터뜨렸다.

아울러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이 앞으로 국제연합의 회원국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함과 동시에, 1905년에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긴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상기시키면서 얄타 밀약으로 인해 한국이 비밀외교의 희생물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은 얄타 밀약설은 사실무근이며, 한국은 창립총회에 참가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며, 카이로 선언이 지켜질 것임을 거듭 확인해온 것처럼 한국민은 독립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얄타 밀약설 통해 이승만은 미국정부로 하여금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카이로 선언을 환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미국이 소련을 중시하는 친공정책을 지속할 경우 전후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위험성과 경각심을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아가 한반도에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친미성향의 정치사상을 미국 사회에 다시금 홍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록물 소장처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 http://syngmanrhee.yonsei.ac.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