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내고장 역사찾기 본문 내용

강원 철원군 : 내고장의 우수 기록물 사례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수 기록물 사례 강원 철원군
강원 철원민통선 마을의 평화 이야기/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 *김영규 : 강원도 철원군의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 참여자

철원군은 전 지역이 수복지구다. 수복지구는 6·25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 후 남한 즉,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지역을 말한다. 3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으로 철원지역은초토화되어 인구 2만 명이 거주하던 구 철원읍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고, 그곳에 살던 주 민들도 80% 이상이 뿔뿔이 흩어졌다. 철원의 현대사는 삶의 터전과 주민, 기록이 모두 사라지는 역사적 공백기였다.

일제시대 번성했던 철원읍 전경

1953년, 전쟁은 끝났지만 철원지역 주민들은 자기가 살던 옛 고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에는 휴전선이 그어지고 DMZ(비무장지대)와 민통선(민간인통제선)이 설정되어 군인과 군부대만 들어섰다. 세상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어도 38도선이나 휴전선에 묶여있는 철원군의 운명은 바뀐 것이 없었다. 자신의 농토를 되찾는 데만 20여 년 세월이 필요했고, 마을 출입이 자유로워진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철원읍 시가지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38도선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처리 문제해결을 위해 미국과 소련의 군사·정치적 편의에 의해 그은 선이다. 휴전선(군사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은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싸움을 잠시 쉬기로 하자’고 미·소·중 강대국의 합의로 그어진 선이다.

그 길이는 249km(155마일)로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간성 북방에 이른다. 남북은 휴전선 옆으로 또 하나의 선을 그어 쌍방이 군대 주둔이나 일체의 무기 배치, 군사 시설 설치를 금지하도록 약속하고, 남과 북으로 각각 2km씩 폭 4km 완충지대를 만들어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라 이름 붙였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약 990㎢(3억 평)에 달하는 방대한 땅이 비무장지대란 이름으로 갇혀 있다.

철원북방 DMZ 안 태봉국 도성터

비무장지대 외곽에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철책선이 쳐져 있고, 남방한계선 바깥으로 5~20km 남쪽에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1954년 2월, 미 육군 제8군단 사령관은 민간인 귀농을 규제하는 귀농선을 설정하고, 휴전선 일대 군 작전과 군사시설 보호 및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휴전선을 따라 총 면적 1,528㎢에 이르는 또 다른 띠가 형성된 것이다.

경기도 강화·김포·파주·연천,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등 소위 접경지역의 213개 리가 이 띠 속에 갇혔다. 1958년 6월부터 휴전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됐고, 한국군은 군 작전이나 군사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을 허용했다. 그리고 귀농선은 민간인 통제선(민통선, Civilian Control Lin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일 영농출입 민통선 검문소 통과 모습
철원평야(대마리)와 인근 지뢰밭
황무지였던 유곡리 일대 농경지

수복 초기에는 미군정이 새롭게 건설한 민통선 밖 정착촌에 머물며 일일출입허가를 받은 후에야 자기 농토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철에는 출입허용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빈번했고, 군부대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에서 작전상 불가하다고 맞섰다.

안보가 최우선인 1960~1970년대에는 모든 주민과 관공서가 관할 부대장의 눈치만 봐야 했다. 어떤 이는 자기 논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댈 욕심에 몰래 움막을 짓고 논에서 하루, 이틀 목숨 걸고 숙박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고 주민들의 요구가 비등하자 군 당국 에서는 농번기에 한해 일시적인 체류를 허가하였다. 그러나 자기 농토가 있는 남자들만 일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군 천막에서 유숙하는 형태였다. 이들은 일주일이나 열흘 간격으로 민통선 밖 집으로 나와 식량을 조달하거나 식구들을 만나곤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동안은 군인과 똑같이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받으며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옛 김화군의 중심지 생창리
1979년 대마리 민북지구 취락구조 개선사업 완수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고향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해 농지확장은 물론 식량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가안보체제도 강화하고 대북심리전 우위를 확보할 요량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민북마을은 민통선북방마을의 준말이다. 민북마을은 일반적으로 전략촌이라고 통칭되는데, 실제로는 각 마을의 입주배경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그 명칭으로는 초창기‘자립안정촌’과 이후에 가장 많이 건설된 ‘재건촌’,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파주 대성동과 철원 유곡리 두 곳에만 시범적으로 건설된 ‘통일촌’ 등이 있다.

민북마을이 크게 3부류로 구분되는 기준은 조성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을 조성과정에 정부가 얼마나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시기적으로는 뒤로 갈수록 정부의 행정 및 재정 지원이 확대된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0년 관전리 32세대,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근남면 마현2리 60세대,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초기 입주과정에 너무 근시안적으로 공사해 문제점이 노출되고 주택이 노후화되면서 1970년대 후반 전체적으로 보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대대적인 민북지구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완수되면서 민북마을은 당시 언론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문화촌’이라 칭송할 정도로 발전한다.

빈집으로 폐허가 된 양지리 주택

그렇게 개척과 성장의 상징으로 각광받았던 민북마을이 이제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커다란 시련이 닥치며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오로지 잘 살아보겠다는 개척정신으로 터전을 마련한 입주 1세대들은 이미 2/3 이상 별세했고, 2세대들은 농가소득 저하로 고전하고 있다. 이농현상 심화로 마을인구는 격감했고, 급격한 노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하다. 마을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고, 40대 노총각이 마을마다 즐비하며, 대부분의 마을 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빈집이 늘고 폐가가 방치되어 황량함마저 감돈다.

1960~1970년대 입주 초기 아무도 찾지 않던 황무지를 지뢰를 헤치며 목숨 걸고 개간해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수십 년이 지나서 어느 날 불쑥 땅임자라며 나타낸 불청객으로 인해 마을엔 편지풍파가 일었다. 정부에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라며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땅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고, 2004년 전방을 휩쓴 부동산 광풍이 사태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최근 민북마을 근처에는 통일 대비 평화신도시 기반 조성 움직임이 분주하다. 비록 일부구간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철원의 번영을 이끈 경원선 철도 연장 복원사업도 한창이다. 지난 2008년 9월, 양지리 평화전망대에서는 환경부와 강원도가 ‘DMZ 생태평화비전’을 선포하며 DMZ 생태평화공원 조성계획을 구체화했다.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철원평화문화광장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6·25전쟁의 산물이자 냉전의 상징인 DMZ를 남북이 어떻게 활용할지는 향후 초미의 관심사다.

대내외적 환경이 이렇게 역동적으로 변하는데 그 중심인 민북마을은 아주 고요하다. 이제 총체적인 대전환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1970년대, 정부가 나서서 개발했던 접경지역 민북마을, 다시 한번 정부가 나서서 통일의 전초기지로 개발해야 한다. 숙원인 민북마을 토지소유권분쟁 해결도 지지부진하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서 정부주도로 추진된 민북마을 개척 사업에, 그저 열심히 일하면 내 경작지가 생길 거라는 소망을 갖고 일평생을 살아온 입주 1세대들에게 국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

2008년 DMZ 생태평화비전 선포식 철원 북방 옛 금강산 가던 철길

민북지구 개척이 철원군 재건이고, 민북마을 변천사가 철원의 현대사다. 6·25전쟁의 산물인 휴전선과 DMZ, 민통선 그리고 그 안에 건설된 민북마을 모두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의 산물이다. 일부 마을은 급격한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고, 빈집이 늘어 폐허화되고 있다. 그리고 개척의 주인공들인 입주 1세대들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어 이제 민북마을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통일을 준비하는 철원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민북마을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개척마을, 실향민들의 향수를 달래준 고향마을, 국가안보에 일익을 담당한 선전마을,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 완성마을 등으로 기억될 수 있다. 하지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물꼬를 튼 통일마을로 기록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민북마을이 아이들 뛰어놀고 어르신들 웃음 넘치는 평화마을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1. 마현1리 재건촌

마현1리는 1959년 가을 추석에 불어 닥친 사라호 태풍으로 인하여 발생한 경상북도 울진이재민 66세대를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경우다. 1960년 4월 4,일 울진초등학교에서 고향 친지들의 환송을 받은 후 23대의 군 트럭을 타고 횡성~춘천~화천을 거쳐 500여km(1,400여리)를 지나 3박 4일 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최전방 철책 아래 황무지에서 철통같은 감시 하에 천막생활을 하며 변변한 장비도 없이 손수 농지를 개간했다. 4월 7일, 도착한 이들을 반긴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닌 억새밭만 무성한 황무지와 60개의 군부대 천막이었다. 도착 후 12일 만에 4·19가 터져 지원을 약속한 도지사와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행정기관의 보호나 지원은 전혀 없었고 주민자치회에서 협의해 농지를 분배하고 삶의 터전을 닦았다. 입주 1세대 중 현재 생존해 있는 남자는 이제 1명뿐이다.

그런데 철원군에서 가장 척박한 오지로 통했던 마현리가 최근에는 토마토, 오이, 파프리카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예전에 논 면적이 적어 소득이 낮았던 산간 마을이 이제는 대규모 하우스 원예농업으로 번성해 부촌이 되었다. 마현리 승리전망대에 오르면 금강산 가던 철길을 또렷이 볼 수 있으며, 화천으로 통하는 말고개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현리 입주 당시 주택 입주기념비
야생화가 무성한 마현초교 말고개에서 바라 본 마현리
2. 유곡리 통일촌

1973년 경기도 파주 통일촌과 같은 날, 동시에 입주한 유곡리는 파주 통일촌 80세대보다 20세대가 적은 60세대로 구성됐다. 1970년대 이스라엘의 ‘기브츠’를 모방해 만든 유곡리는 전선 방위는 물론 유휴경지 활용을 목적으로 대북한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건설된 선전마을 통일촌이다. 북녘 오성산이 코앞에 보이는 유곡리는 이전의 재건촌과는 달리 정부가 직접 나서 가구당 500만 원 이상의 거금을 지원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전략적으로 만든 인공마을이다.

당시 5군단 예하부대에서 지원자를 모집했을 때 집과 논밭을 무상으로 2만여㎡(6,300평) 분양한다기에 많은 후보자가 몰려들어 자격심사가 까다로웠고, 선발된 사람들은 한 달 전부터 정신교육과 영농교육 등 집체교육을 받기도 했다. 입주 초기 입주민들은 매일 저녁 군보안부대원들의 점호를 받으며 생활하였고, 군 출신과 일반 농민 출신 간에 이질감으로 마을 대소사를 결정함에 있어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유곡리 통일촌 입주기념식

유곡리 입주 당시 주택그러나 1982년부터 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전 등기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입주민들은 피땀 흘려 개간한 옥토를 모두 원소유주에게 돌려줘야만 했다. 입주할 때 정부에서 인정한 경작권만 믿고 소유권 없이 개간한 토지를 두고 나중에 나타난 소유권자와 벌이는 소유권 분쟁은 유곡리 주민들에게 끝없는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이런 와중에 2000년과 2005년 민북마을을 휩쓴 부동산투기 광풍으로 유곡리 주민이 소유한 유곡리 땅은 이제 30%도 채 안 될 정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유곡리 통일촌 버스 개통 유곡리 통일촌 마을 입구
3.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는 남북 간 체제 경쟁과 대립이 극에 달했던 1968년 민통선 북방지역 농지개간과 정부의 재건촌 건립 계획에 의거,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군인과 지역 주민 위주로 선발해 150세대가 입주한 경우다. 주민들은 낮에는 농지개간에 힘썼고 밤에는 안보일선에서 총을 들고 적의 동태를 감시했다. 농지를 개간할 때 지뢰와 폭발물로 인해 팔다리를 잃고 불구자가 된 이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구호나 보상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끼리 피땀 흘리며 똘똘 뭉쳐 난관을 이겨 나갔다.

그런데 어렵게 농토를 일구어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개간한 농지의 원소유자들이 나타나 토지소유권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지뢰밭과 황무지로 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내놓으라는 것이다. 농지경작권을 인정해줄 테니 걱정 말고 입주를 하라고 권유했던 정책책임자들은 지금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의 피해를 누가 치유해줄 것인가?

대마리 입주 초기 경운기 수령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회, 청와대에서도 토지소유권 분쟁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고 있지 않다. 마을 안쪽 공원 개척비에는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라고 적혀 있다. 대마리 마을회관에는 정면에 ‘자립갱생(自立更生)’이라는 큰 현판도 걸려 있다. 이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언제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느냐’는 마을주민들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외로이 싸우고 개척해 나가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대마리 마을회관의 군인들 경계 근무
대마리 마을 개척비 제막식
4. 철새마을 양지리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마을 북쪽 6km 지점에는 휴전선과 제2땅굴이 위치하고, 마을 뒤편에는 내수면적 3㎢(338.85ha) 규모의 철원군에서 가장 큰 저수지, 토교저수지가 있다. 일제강점기, 금강산 가던 철길 정식역이 위치할 정도로 부촌이었던 양지리는 철원군에서 가장비옥한 토질을 자랑한다. 6·25전쟁 후 오랜 기간 일일영농출입을 하다가 다른 지역보다는 늦은 1979년, 29㎡(9평) 단독주택에 두 가구씩 모두 100호가 입주했다.

양지리 철새마을

그러나 다른 민북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인구감소와 노령화가 심해지고, 현재는 75가구가 살고 있다. 초창기 보급된 주택은 너무 비좁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반씩 나눠 쓰던 것을 대부분 한 채로 개조하였다. 한때 학생 수가 100여 명이 넘던 양지초등학교는 이미 오래전에 폐교되었고, 지금은 철새탐조 체험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양지리의 별칭은 ‘철새마을’이다. 철원평야의 젖줄 역할을 하는 토교저수지는 매년 다양한 종류의 겨울 철새들이 찾아 들어 철새탐조 관광객들로 붐빈다. 매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쇠기러기 30만 마리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이곳엔 천연기념물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1,000여 마리와 독수리 300여 마리가 월동한다.

이른 아침 쇠기러기 수십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저수지에서 차올라 비상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토교저수지는 철원평야 안전영농기반 구축 및 농업용수 공급을 위하여 조성되어 일명 ‘전천후보(全天候洑)’로 불리기도 한다. 1968~1978년 10년간에 걸쳐 만든 대규모 인공저수지로 저수량 약 1만 5,000톤이며, 양지리와 대위리·장흥리·오덕리 일대의 농경지에 관수를 하고 있다.

최근 주민들은 겨울철새를 활용해 본격적으로 생태마을로의 변신을 시도해왔다. 그 결과, 2000년 도 친환경 우수마을 선정, 2002년 도 새농어촌건설운동 사업자 선정, 2003년 환경부 생태우수마을 지정, 2004년 농림부 녹색농촌마을 선정 등 희망의 불씨를 키워냈다.

비상하는 기러기 잡초가 무성한 양지초교
도쿄저수지 준공식

주민들은 늘어나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두루미펜션 등 숙박시설과 자연생태학습원까지 만들었다. 이곳에선 특히, 도시 학생들의 여름철 농촌체험과 겨울철 두루미학교 체험활동이 활발하다. 시류에 맞춰 농가소득을 창출하기 위해 시도한 생태마을로의 성공적 변신은 다른 민북마을에 귀감이 되고 있다.

마을 북쪽 전방지역에는 제2땅굴과 월정리역, 철원평화전망대, 철새두루미관 등이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에는 분단으로 끊겨버린 철도와 녹슨 철마가 덩그러니 남아 있고,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 철원평화전망대에서는 궁예왕의 웅지가 서려있는 태봉국도성 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평강고원도 볼 수 있다.

마을 서쪽에는 아이스크림고지 삽슬봉이 있는데, 이 아이스크림고지는 6·25전쟁 때 수 많은 포탄에 산이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5. 충절의 고장 생창리

북으로 성재산과 계웅산이 에워싸고 남으로 화강이 흐르는 생창리는 고구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김화군의 중심지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10만 대군에 맞서 용전분투했던 홍명구공과 유림장군의 충절이 깃들어 있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금강산 가던 길에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화강백전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여러 마을이 병합되어 생창리로 개칭되었고, 1953년 수복되면서 옛 김화군 대신 철원군 김화읍으로 바뀌었다. 이후 남북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70년 10월 30일, 재향군인 100세대가 입주하여 재건촌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는 다른 민북마을과 마찬가지로 이농현상으로 인구감소와 노령화가 심각하다. 폐허가 된 빈집과 폐교된 운장초등학교의 썰렁한 모습이 민북마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생창리는 구 김화권의 중심지다. 일제강점기 때 인구 1만의 황화철산지인 김화는 행정구역마저 철원군에 병합된 채 사라졌으나 정신은 살아있다. 6·25전쟁 직전까지 마을 바로 옆에 김화군청이 있었고 김화권의 중심부로 영화를 누렸다. 당시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을 통해 원산의 수산물과 철원의 쌀을 교환하는 등 남북을 연결하는 물류통로로 주목을 받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사의 아픈 상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한데, 인공치하 북한 정치보위부 건물이 있었던 동굴, 끊겨진 암정교 등은 안보교육의 산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으로 마을을 떠난 이후 1970년대 초, 이 마을에 입주한 주민들은 현재 97가구 350여 명으로 넉넉하지 못한 논과 밭을 경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하우스농사가 성행해 토마토와 오이 생산이 늘어 농가소득이 증대되었다.

충렬사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진격로였고,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남진로였으며, 6.25 때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지만, 변함없이 굳건히 서있는 마을이 생창리다. 생창리 마을 주변에는 성재산성, 어수정, 전골총 등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주민들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끊어진 금강산 전철의 연결로 옛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대 전환기를 맞은 민북마을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 마련도 기대하고 있다. 생창리 토박이인 한 어르신은 “생창리 마을은 조용하기만 한 최북단 작은 마을이지만 남북교류시대가 시작되면 북녘 땅을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는 약속의 땅”이라며, “대다수 주민들은 머잖아 번영했던 옛 김화군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암정교 잔해
통일로 가는 길 생창리
위로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