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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찾기 본문 내용

경기 김포시 : 내고장의 우수 기록물 사례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수 기록물 사례 경기 김포시
경기 김포시의 사람과 생활
1. 5,000년 벼농사의 시원지, 김포

김포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정립(鼎立)하고 있었을 시절, 그야말로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최초로 ‘검포’라는 지명으로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것이 고구려 장수왕63년 (475)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16년(757)에 김포현(金浦縣 : 김포, 검단, 고촌지역)으로 개칭되면서 김포(金浦)라는 명칭을 쓰게 됐다.

이 지명은 ‘존장 또는 부족장이 다스리는 바닷가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 제방이 없던 시절, 강물과 바닷물이 드나드는 개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검은 개(바다) 고을’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2. 김포의 근현대 역사자료 조사

내고장 역사찾기를 통해 김포에서 찾은 기록물은 총 1,271점이다. 특히,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중심으로 한 박물류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는데, 그 수량이 970점에 이른다. 물론 문서류와 시청각류도 많이 발굴하였다. 이 자료들은 모두 김포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기초정보가 될 것이다.

주요 기록물을 살펴보면, 영농일지(1950, 1960)·진사시험 제출 답안지(1749)·신식청년 척독 및 상환기일 예고장(생산연도 미상)·농기구 및 맷돌·마패 등이 있으며, 농기구와 생활도구의 경우 농기구 52종, 생활도구 127종 등이 수집됐다.

  • ○ 사업주관 : 김포시, 김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 ○ 조사기간 : 2009년 6~11월
  • ○ 참여인원 : 희망근로인력 20여 명
  • ○ 조사대상 : 문서류 및 박물류(농기구 및 생활도구에 중점)
  • ○ 조사분량 : 총1,271점
문서류 및 박물류 목록
유형 문서 고문서 시청각 박물 간행물 도면·지도
수량 157 90 48 970 2 4
  • ○ 농기구와 생활도구
농기구와 생활도구
농기구(52종) 가래, 가마니, 가마니틀, 가축 주사기, 갈취, 거적, 곡괭이, 곰방메, 광주리, 그네, 길마, 끙게, 나래, 낫, 농약분무기, 달구지, 도리깨, 망태기, 멍석, 멍에, 맷방석, 못줄, 밀대, 바구니, 바람개비, 바람개비 날, 발, 발채, 새끼틀(제승기), 섬틀, 소굴레, 소코뚜레집게, 써래, 씨아, 용두레, 워낭, 인삼씨송곳, 작두, 작두날, 쟁기, 쟁깃날, 절구, 절국공이, 제기, 접시, 제초기, 지게, 지게작대기, 채반, 결톱, 탈곡기, 함지박, 호미 등
생활도구
(127종)
가마솥, 솥뚜껑, 가위, 가죽칼갈이, 석유풍로, 국자, 기와, 놋수저, 놋젓가락, 놋주걱, 누룩고리, 다듬이돌, 다듬이방망이, 다리미(손), 다식판, 단지, 대접, 톡/항아리, 동고리, 됫박(되), 두레박, 뒤주, 떡메, 거름통(똥통), 똬리, 말, 맷돌, 머리빗, 문짝, 물통, 바둑판, 바디, 병풍, 북, 비녀, 사물함, 사발, 상여, 솔, 술춘, 시계(괘종), 시루, 시루방석, 얼레, 이발기(바리캉), 책꽂이, 체, 쳇다리, 축음기, 텔레비전, 풀무, 전통춤한복, 원삼, 족두리, 고쟁이, 가채, 곽대(각대), 관복(단령), 목화(신발), 신부옷함, 청사초롱, 호롱(등잔), 호족반/제사상, 호패, 홍두깨 등
3.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김포 마을이야기

(1) 전류2리 민영만 어르신의 ‘그땐 그랬지’

○ 전류2리는 원래 ‘전류리’였으며, 행정구역이 1, 2리로 나뉘기 전에는 마을행사와 풍습을 공유했었다. 전류2리에는 현재 가옥이 30호 정도 남아 있으며 마을회관은 없다. 주요 성씨로는 여흥 민 씨 유수공파(8호)와 지호공파(8호), 서현동에 강씨마을 4호가 대표적이다.

전류2리 주민 민영만 어르신○ 일제강점기시절에는 다나까라는 일본인이 인력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아 논으로 개간하였는데, 당시 지계로 흙을 옮기는 작업을 하면 보수로 60전(좁쌀 2포 값-1포 25kg)을 주었다. 일본 주인은 한국인 관리자를 두어 3대 7(지주)로 벼이삭을 정확히 나누었고, 소작농은 벼 한 단이라도 더 얻어내려고 한국인 관리자에게 장어와 술대접을 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옛 땅을 찾겠다고 일본에서 다나까의 아들이 다녀갔다.

○ 삼포농사는 1946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개성사람에게 인삼 씨를 시가의 2배 주고 사서 도짓밭을 쌀 2가마 주기로 하고 시작하였다. 이후 2자리 2,500여㎡에서 재배를 했으며, 다른 주민 5명도 800여㎡씩 삼포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6년근이 되기전 4~5년째에 자주 도둑이 발생하였다.

○ 전류리 포구에서는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팔기도 했는데, 1955년경에도 이 포구에서 조기를 팔았다.

○ 창고에는 지금도 옛날 물건들이 남아 있다. 바람으로 벼를 분리하는 풍생기, 오래된 재봉틀 등이 그것이다. 또 10살 때부터 써오던 일기와 가계부 등도 있다.

(2) 마곡2리에 사는 어르신들의 ‘그땐 그랬지’

○ 마곡2리는 현재 67호, 120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행사로는 해마다 노인회 관광이 있고, 12월에는 대동회 모임을 한다. 이곳엔 300년을 산 회화나무, 330년을 산 느티나무 2그루, 100년을 넘게 산 팽이나무가 있다. (민경제)

○ 1968년 전기가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전기값을 아끼려고 두 방 사이 벽에 구멍을 내 전등 1개로 2개의 방을 밝히기도 했다. 또 1970년대에는 쌀 12가마 값으로 전화를 처음 설치하였는데, 교환전화 시절이라 이장 집에 설치된 전화기 1대를 마을 전체가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의무계’라 하여 예전에는 초상이 나면 집집마다 쌀 1되와 막걸리값 돈 30~100원을 내고 3일장을 치르기도 하였다. (심복섭)

○ 마곡2리는 마을을 안고 있는 형태라서 이 동네를 ‘안산(案山)’이라고 불렀으며, 수리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벼를 심을 수가 없어 피와 메밀을 심기도 하였다. 이곳에 6.25 때는 터키군 소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이기창)

○ 330년이나 된 이 느티나무에 배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다. 아마도 우물을 팔 때 밭에 갯벌 흙이 많이 나온 것을 보면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100년이 넘은 집에 아직 살고 있고, 150년이 넘은 고가구와 조상들이 쓰던 필서, 고서 등이 많이 있다. (민경태)

오래된 재봉틀, 마곡2리 주민들, 330년 된 느티나무
4. 고문헌에서 찾은 조상들의 흔적과 그리움

(1) 책 읽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민헌기 어르신

민병락, 호는 소천(小泉). 그는 민헌기(36년생) 어르신의 부친으로 2000년 93세로 작고하였다. 전류리 토박이였고 노인회장을 지낸 인물로, 인품이 솔직하고 다정하여 이웃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어릴 적 서당을 다녀서 한학에 능하였으며, 하성면 주민들 수백 명에게 작명을 해주기도 하였다. 농사를 지으며 친구들과 시를 읊기도 하고 글쓰기도 즐겨하였다. 노인회장을 맡았을 때는 초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하성농우회 정관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마을 부적을 작성하거나 굿하는 날과 기타 택일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행실록」이라는 책도 직접 작성하여 널리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민헌기 어르신은 “책이 녹아내릴 때까지 공부를 하셨다”는 말로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는 부친이 즐겨 보던「옥편」과 고서인「천기대요(天機大要 : 역학·상장·혼인·양택·제사에 관한 책)」,「간독정요(簡牘精要 : 편지 쓰는 예문 등을 기록한 고서)」,「천자문(千字文)」,「비정집((肥精集) : 국사봉하헌(國思峯下軒)」,「후집대전(後集大全)」등 여러 종류의 고서와 수첩, 금전출납부를 간직하고 있으며, 각종 편지, 12덕목에 대한 친필 액자, 공로상장 등도 보관하고 있다.

부친을 추억하는 민헌기 어르신, 간독정요
옥편, 12덕목 친필 액자

(2) 김포 토박이 집안에서 살아온 권정택 어르신

김포 토박이 권정택 어르신권정택 어르신은 조상(안동 권씨 추밀공파, 남강공파) 대대로 이곳 김포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지금의 집에서는 조부 때부터 살고 있어 옛날 부친(권의훈)이 남긴 옛문헌이 많이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여러 권의 서책들을 보여주었는데, 그중「부조기」와「추수기」 2권의 장부가 눈에 띤다.「부조기」(임오년)는 일종의 축의금 목록으로 조모 환갑잔치에 들어온 국수·감주·옷·양말 등의 부주 내용들이 적혀 있다.「추수기」(갑오을미도)는 그 해에 추수한 곡식 등의 목록이었다. 둘다 부친이 기록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오랫동안 부친이 사용해왔던「가정보감」(지금의 백과사전),「안동 권씨 가계」(족보),「필서」(택일) 등이 있었다.

부조기 추수기 가정보감
5. 잊혀져가는 농기구와 각종 생활도구들

(1)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데 사용하는 ‘용두레’

용두레용두레는 깊은 곳에 고인 물을 높은 곳에 있는 천수답으로 퍼 올리는 재래식 양수도구로, 지방에 따라서 통두레, 파래, 품개, 풍개로 부른다. 만드는 방법은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게 파낸뒤, 중앙부 양쪽으로 가는 구멍을 뚫어, 막대를 가로질러 끼운 다음, 끈을 묶는 것이다.

사용할 때는 기둥 3개를 원뿔형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용두레 끈을 매어 앞뒤로 움직이면서 물을 푸면 된다. 처음에는 용두레로 물을 푸다가 물이 깊어지면, 두 사람이 마주서서 각각 두 줄씩 쥐고 맞두레질을 해 물을 푼다. 용두레에는 30~40ℓ의 물을 담을 수 있으며, 혼자서 1시간에 15~20t의 물을 퍼낼수 있다.

(2) 손이나 발로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

바람개비바람개비는 곡물에 섞여있는 검불이 나 협잡물을 날려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지름 1m 정도의 날개를 3~4장 정도 가지고 있고, 이 날개를 빨리 돌리기 위해 치차(기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입력축보다 3~4배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바람개비로는 1시간에 벼 10가마를 선별할 수 있다. 지방에 따라 ‘팔랑개비’라고도 하며, 1900년대 초기에 일본에서 들어왔다.

(3) 흙을 잘게 부수거나 땅을 판판히 고르는 데 사용하는 ‘써래’

써래써래는 긴 토막나무에 둥글고 끝이 뾰족한 이(齒) 6~10개를 빗살처럼 나란히 박고 위에 손잡이를 가로로 댄 도구로, 토막나무에 대각을 이루도록 긴 나무를 박고 여기에 봇줄을 매어 소 멍에에 잡아매 사용하였다.

(4) 소 등받이로 소 등에 얹어 물건을 나르는 ‘길마’

길마길마는 말굽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무 2개를 앞뒤로 나란히 놓고, 안쪽 양 편에 2개의 막대기를 고정시킨 후, 안쪽에 짚으로 짠 어치를 대, 소의 등에 얹어 사용하는 도구다. 지방에 따라 형태가 다르고, 대·중·소 크기가 있으며, 중간 것은 15kg 내외, 적재량은 113~131kg 정도다.

(5) 짐을 일 때 머리 위에 얹어 짐을 괴는 고리 모양의 ‘똬리’

똬리똬리는 지방에 따라 ‘또아리’, ‘또가리’, ‘또야리’, ‘또바리’ 등으로도 불린다. 주로 짚이나 왕골·골풀·헝겊·죽순껍질 등으로 만들며, 짚이나 헝겊을 둥글납작하게 틀어서 심을 만들고 왕골이나 골풀로 곱게 싸서 마무리한다. 똬리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끈의 끝을 입으로 물고 물건을 들어 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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