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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찾기 본문 내용

경남 고성군 : 내고장의 우수 기록물 사례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수 기록물 사례 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군의 선사부터 이어진 기록들
1. 고성군 일반현황

(1) 高城이 아니라 固城

고성은 우리나라의 강원도와 경상남도에 존재한다. 물론 한자가 다르긴 하다. 강원도는 ‘높을 고(高)’를 쓰고, 경상도는 ‘굳을 고(固)’를 쓴다. 이제부터 굳고, 단단하고, 튼튼한 ‘고성(固城)’과 고성에 남은 기록물을 소개하려 한다.

고성은 경상남도 남부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동으로는 바다를 끼고 서로는 사천시, 남으로는 통영·거제시, 동북으로는 창원시, 서북으로는 진주시와 접하고 있다. 고성군은 행정구역상 1읍, 13면, 119개 법정리, 262개 행정마을을 가진 곳이며, 면적은516.9㎢로 경상남도의 4.9%를 차지하고 있다.

고성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아마도 공룡모형일 것이다. 고성에서는 공룡과 관련된 박물관과 축제뿐만 아니라 도속도로 휴게소 이름에도 공룡이 들어간다. 고성군을 대표하는 마스코트기 때문이다. 물론 공룡이 남긴 역사의 자취는 몇 개의 발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고성에는 이 외에도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중 2009년부터 2010년 사이,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을 통해 발굴한 고성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한 역사기록물을 중심으로 고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성군 대표 마스코트인 공룡

(2)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 통해 만난 고성

고성에서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을 통해 찾은 기록물은 총 440점이었다. 유형은 문서·고문서·도면/지도·간행물·박물·시청각 등이며, 이 중 시청각자료는 126점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고성군 기록물 목록
유형 문서 고문서 시청각 박물 간행물 도면·지도
수량 172 35 126 49 49 9

시기적으로 분류하면 조선시대에는 통문, 교지 등의 문중기록물과 향교기록 등이 16점,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생활기록과 면사무소 행정문서 등이 23점, 광복 이후 1946~50년대에는 토지 및 재산 관련 면사무소 행정기록 등이 45점, 1960~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 관련기록물 등이 109점, 1980~1990년대에는 기록물이 110점, 기타 및 생산년도 미상기록물이 137점으로 조사되었다.

고성의 기록물을 살펴보다 보면 고성이 우리나라 남단의 작은 군이 아니라 고유한 기록과 역사를 가진 전통 있는 고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2. 고성향교와 유교정신을 잇는 유생들의 기록

(1) 파란만장한 고성향교의 역사

고성향교에 들어서자 위풍당당한 명륜당이 과거 향교 유생을 짐작케 한다. 고성향교는 1464년에 처음 고성읍 향교동(현 고성읍 교사리)에 건립되어,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중등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현령 정여린과 도감 이현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1870년에는 고성군과 통영군이 통합되면서 통영군 선도면 죽림리로 이건되었고, 고성군이 환원되면서 1875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후 1983년, 경남문화재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고성향교에서는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제(朔望祭)를 행한다.

고성학교

(2) 유생들이 남긴 기록들

• 고성향교유생안
유생안은 향교 교생들의 이름을 적어둔 서책으로, 현재 고성향교에 보관 중인 유생안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1900년에 만들어진 고성향교유생안이다. 향교 교생은 법제상으로 신분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15~20세(시대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음)가 되어야 입학할 수 있었고, 교안에 올려지면 유학(幼學)의 직(職)으로 기록되었다. 교생이 되면 향촌사회의 사족으로 신분보장이 되고 군역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고성향교유생안

• 고성향교분향록
분향록은 향교행사 시 교생들의 역할을 적는 명부다. 교생들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과 함께 향교를 돌보고 향교의 여러 행사를 치러야 했는데, 향음주례(鄕飮酒禮)·백일장·망곡등의 행사를 담당하는 교생을 집사 혹은 정교로 칭하고, 필요에 따라 교생 중에서 선발하거나 윤번으로 담당을 정하여 업무를 맡겼다.

고성향교분향록

• 서식참고용 책
앞표지에는 책명이 없으나·부모님 전상서·각종 서신·혼인서약서 등 교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양식을 묶어둔 책이다.

서식참고용 책
3.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새마을운동중앙회 고성군지회

(1)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다양한 새마을운동 사업

새마을운동 하면 1970년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노래 가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과거의 새마을운동은 우리가 배고팠던 시절에 먹고살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각 지자체마다 있는 새마을운동지회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새마을고성군지회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현재 고성의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Green Korea, Smart Korea, Happy Korea, Global Korea라는 중점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고향의 발전을 위한 국토대청결운동·헌옷 모으기 경진대회·하천정화운동·사랑의 집 고쳐주기·사랑의 김장 담그기·새마을 지도자 육성·외국인 새마을 교육·새마을방식 시범마을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지회 사무소에 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박물이며 훈장, 옷가지 등 볼거리도 많다. 그중 몇 가지 자료를 소개한다.

고성 새마을운동 중앙회

• 새마을운동 고성지회 회관 설계도
1971년 중앙회 본부에서 내려온 표준설계도에 의해 지어진 새마을회관은 고성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도 모두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설계도가 몇 개 남아있지 않아 지금은 매우 희귀한 기록물이다.

새마을회관 설계도

• 시계와 라디오
사진 속 시계와 라디오는 새마을운동을 솔선수범한다는 공로를 인정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한 것으로, 새마을 역사기록을 모아놓은 고성지회의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 하면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 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떠오를 정도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의 국가 제일 정책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각 지회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우수새마을지도자상, 훈장, 기념품 역시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 속에서 이러한 기록은 하나 둘 없어지고, 지금은 이렇게 별도의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남아 있다.

사진 속 라디오를 보면,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의 붉은 마크가 눈에 띄는데, 세월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새마을운동 표창 라디오, 새마을운동 표창 시계
4. 말 모양의 돌이 있는 마을, 마암면

(1) 석마상에서 유래한 석마리와 마암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마(경남민속자료 1호)고성군 마암면은 13개의 면 소재지 중 하나로, 소가야시대에는 곤의부곡과 발산부곡의 일부에 속하였으나, 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동마면과 서마면으로 나뉘어졌고,1914년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면을 통·폐합할 때 병합되어 화양면의 배둔 일부를 편입시키며 마암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암면의 유래는 석마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석마리에는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아래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마(돌말)상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에 마을 이름을 석마라 하였으며, 이것이 마암면이라는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새마암면사무소

(2) 캐비닛 문을 연 마암면사무소

면사무소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 및 책임과 관련한 재산증명서, 개인기록증명서 등 모든 증명과 관련된 기록물이 있다. 지금은 집에서도 컴퓨터와 프린터기만 있으면 민원서류를 뗄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면사무소에 찾아가 수기로 적혀 있던 서류를 복사해와야만 했다. 마암면사무소는 이번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을 통해 캐비닛의 문을 열어 켜켜이 묵혀 두었던 50년 된 기록을 공개하였다.

(3) 마암면사무소에서 발견한 농지개혁 문서

대한민국 농지개혁은 8·15 해방을 계기로 실시되었다. 일제시대, 지주적 토지 소유를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농지개혁의 토지 분배는 호당 2정보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작자에게 매각하였다. 매각 가격은 농지 생산물의 300%를 15년간 분할 상환하는 것이었는데, 1951년에 일반농지와 같이 150%를 5년간 상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일반농지는 정부가 수립된 후 분배되었으며,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정부가 취득한 농지를, 당시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경작능력에 비해 과소한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농업경영에 경험을 가진 순국열사의 유가족, 영농력을 가진 피고용 농가,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의 순으로 분배하였다.

바로 이러한 농지개혁에 따라 분배된 농지에 대한 상환 관련 문서들이 마암면사무소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농지개혁 관련 문서
5. 선조의 기록을 소중히 간직한 마을사람

(1) 시간을 거스른 고성 학동마을

학동마을은 전주 최 씨의 집성촌이 있는 마을로 돌담길이 유명한 곳이다. 마을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2~5㎝)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르게 쌓았는데,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에 마치 시간을 거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학동마을 돌담길

(2) 기록 속에 남아있는 가족의 숨결

학동마을 주민 최일용 어르신학동마을에 위치해 있는 최일용 어르신의 집을 찾았다. 그의 집 장롱 안에는 보자기에 싸여진 기록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오래되고 낡은 기록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조부, 고조부와의 추억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의 소장품 중 계시 학동에게 선현의 명언을 그대로 쓰게 한 체본(體本), 집에 온 과객들이 쓴 글과 그림 등을 소개한다.

• 수묵화 족자
이 족자는 고조부가 손부의 신혼여행 때 준 선물이다. 대나무와 난이 있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최일용 어르신 부부는 고조부를 회상하게 된다고 한다.

최일용 어르신 소장 수문화 족자

• 안중근의 손도장이 있는 독립자금영수증
이 영수증은 고조부가 일제시기 독립자금을 준 후 받은 답례품으로, 안중근의 유명한 글귀가 있는 가품이다. 기록물 뒤편에 ‘3월 25일 금 13만 4천 원’이라고 흐리게 연필로 쓰여 있다.

 독립자금영수증

• 향교 교생의 교재, 체본들
고조부가 향교 경연참찬관으로 재직할 때 교생들에게 명언을 그대로 따라 쓰게 한 체본들이다.

향교 교생의 교재, 체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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