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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땅속에서 큰 불, 대형 유전(油田) 아니었을까?

「조선왕조실록」 -  원유 나온 포항일대 잦은 지화(地火) 기록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데일리스타는 최근 북한의 평양 일대 또는 서해안에 몇 년째 계속되는 하락으로 최저가를 기록하고 있는 현재 가격을 기준으로도 3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37조 원 상당의 원유가 매장된 대형 유전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또 북한이 원유로 확보한 외화를 핵개발에 사용한다면, 한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덧붙여, 관심을 더했다.

이에 앞서 미국 해지펀드 파이어버드매니지먼트의 제임스 파산은 지난 1월초쯤 뉴욕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에 많은 양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으며, 지난해 12월말 발행된 주간동아도 서해안에 매장된 원유를 둘러싼 북·중간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소개했다.

<주간동아>는 「산유국 꿈꾸는 평양 걸림돌은 베이징?」 제하의 기사에서 36년 전 김일성 주석이 조선노동당 6차 당 대회에서 원유개발 문제를 언급한 이후 산유국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에 시달려 온 북한 권력자들의 오랜 꿈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서해의 원유 매장 가능성과 관련, 이 기사는 지난 2012년까지 북한의 원유탐사와 개발에 참여했던 영국 아미넥스에서 프로젝트 책임자로 일했던 지질학자 마이크 레고가 그의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육지와 바다에 원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원유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으며, 북한당국이 지난 1960년대부터 원유탐사 정부기구를 설치하고, 공을 들여 온 곳도 바로, 여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에너지의 99%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산유국의 꿈을 꾸어오기는 마찬가지이다. 1976년 1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일문일답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서 양질의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하자, TV를 지켜보던 온 국민이 환호성을 질렀으며, 발표하는 대통령 자신도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는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여, 전 세계가 오일쇼크를 겪던 때여서 산유국의 꿈은 더욱 절실했다. 포항의 석유개발은 경제성이 낮은 것으로 판명되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졌지만, 검은 진주가 펑펑 쏟아지는 대규모 유전은 세계 5위의 원유 수입국인 우리에겐 여전히 꿈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8년 7월 울산 앞바다에서 동해-1 가스전 시추에 성공해 세계 95번째 산유국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34만 가구가 쓸 수 있는 가스와 2만대의 자동차에 기름을 채울 수 있는 규모로 전체 수요에는 어림도 없는 양이다. 우리나라에는 경제성 있는 유전이 정말 없는 걸까. 기록으로만 보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증보문헌비고」등의 기록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무수히 많다. 산이(山異), 지열(地裂), 산명(山鳴) 등은 지진에 대한 표현으로, 지함(地陷)은 씽크홀, 지경(地鏡)은 신기루로 추측되는데, 지연(地燃), 지소(地燒), 지화(地火) 등은 석유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에너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에는 화재에 관한 기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땅에서 불이 났다는 가늠조차 힘든 표현이 2차례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인 609년 정월에 경주 모지악(毛只岳)에서 땅에 불이 붙었는데(地燒), 가로가 4보(1보=60cm), 세로가 8보, 깊이가 4자(1척, 1자=30.3cm)나 되었으며 10월 15일에서야 꺼졌다. 또 하나의 기록은 태종 4년인 657년 7월 경주 토함산 동쪽에 불이 나(地燃) 3년이나 탔다는 것이다. 지진이나 용암분출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지만, 이 같은 현상은 지연(地燃)이나 지소(地燒)와는 의미가 전혀 다른 산이(山異), 지열(地裂), 산명(山鳴) 등으로 표현했다. 또한 민가나 임야에 불이 났다는 표현과도 다른 것으로, 수개월에서 몇 년까지 땅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석유 같은 액체형태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었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고려사」에도 땅에 불이 났다는 기록이 2차례 있다. 고려 인종 8년인 1130년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인 백주 토산 서남쪽 땅속에서 불이 솟아 나왔는데, 땅속 2자까지 붉었으며 동서가 1320자, 남북이 3360자에 이르렀다. 6월 20일부터 9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9월 3일 비가 오면서 점차 꺼졌다. 명종 10년인 1180년 3월에도 지금의 평양인 서경 의연촌에서 땅이 탔는데, 가로세로가 6자를 넘었다.

「삼국사기」에 땅에 불이 난 것으로 2차례 기록된 경주는 실제로 석유가 나오기도 했고 유전 가능성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포항 인근이고, 「고려사」에 나오는 백주와 서경은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스타가 대규모 유전 가능성을 보도한 바로 그 지역이다. 역사기록의 우연으로만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반도 전역에서 유독 이곳에서만 지연(地燃)이나 지소(地燒)가 있었던 것은 유전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지소(地燒) 또는 지화(地火)로 표현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93권 1441년 7월 21일 두 번째 기사는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길도 온성부 건원동에서 땅에 불이 났다는 보고인데, 이 기사는 이 보다 먼저 경상도 영해와 함길도 경성에서도 땅이 타서 수십 년 동안 꺼지지 않았는데, 前좌의정 최윤덕과 승지 조서강 등도 이를 보았다고 보고하여 임금이 전국에 유사한 사례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1445년 1월 20일 두 번째 기사는 경성부 진봉동에서 땅이 탔는데, 길이가 23척, 너비가 12척이라는 함길도 감사의 보고이고, 같은 해 4월 12일 두 번째 기사는 경상도 감사가 영해부 남쪽 산록에서 1436년 2월부터 땅에 불이 나 1442년 3월에서야 꺼졌는데, 올해 2월 발생한 들불이 땅으로 옮겨 4월 현재까지 타고 있으며, 길이가 8척, 넓이가 4척으로 석유황(石硫黃) 냄새가 난다는 보고이다. 이날 임금은 더 이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땅을 깊이 파서 잘 살펴보고 보고하라 명했다. 적게는 몇 개월부터 수십 년까지 땅이 탔다는 기괴한 보고를 받고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더욱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세종의 격물치지(格物致知) 통치이념과 담대함이 돋보인다.

성종 14년인 1483년 4월 29일에도 지화(地火)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이날 세 번째 기사는 경상도 관찰사 김자정의 보고로 세종 때도 몇 차례 지화(地火)가 있었던 영해부에서 또 땅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길이 7척, 너비 27척 남짓한 땅에서 낮에는 연기가 오르고 밤에는 화광(火光)이 있어 반척을 파 보았더니 화기가 치솟고 사석(沙石)이 불을 이루었다. 이에 임금은 천화(天火)가 내려 와 불사른 것이라면 참으로 큰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이변)이니 인심이 놀라기에 충분하다며 겸사복 황형과 내관 이효지를 보내어 조사하게 했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도 대규모 지화가 있었다. 1531년 5월 13일 첫 번째 기사는 황해도 감사의 보고이다. 지난해 11월초 연안부 다정리 땅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연기가 끼었는데, 너비가 1백여 척(약30m), 길이가 2백보(약 120m)나 된다. 뜨겁기는 온돌과 같아서 밟을 수가 없고, 파서 살펴보니 숯 같기도 하고 재 같기도 한데, 입으로 불어보니 화염이 한자 정도나 피어올랐다. 이 마을 노인에게 물어보니 이 땅은 이손구의 소유로 해마다 물에 잠겨 있었는데, 지난 1512년 9월 불꽃이 피어올라 다음해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 이곳에서는 더 이상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다가 18년여 만인 지난해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물에 잠긴 논바닥에서 불꽃이 일어 8개월여 간 계속되었고, 같은 장소에서 또 다시 불이나 7개월째 계속되고 있다는 노인의 진술은 유전이나 또 다른 에너지의 분출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음날 조정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5월 14일 첫 번째 기사는 삼정승이 이 같은 재변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며 사직을 청한 내용이다. 지난해 5월부터 계속된 한해로 곡식이 타죽고 큰 나무까지 말라 죽었다. 일찍이 이 같은 변고는 없었다. 연안부에서 발생한 지화는 참으로 괴이한 재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신들이 못나고,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니 속히 신들을 체직하여 주소서. 이에 임금은 삼공을 체직한다고 재변이 없어지겠는가. 아무 소용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예부터 재변이 있을 때는 죄인들을 소방(疏放, 사면)한 일이 있다. 큰 죄인은 제외하고 중종 때의 예에 따라 시추(時推, 구속수사) 도형(徒刑, 강제노역) 이하는 모두 소방하라.

기록으로만 보면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유전과 관계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연현상 중에는 1130년 황해도 백주의 지화가 가장 크고 두 번째가 1530년 11월 황해도 연안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불꽃의 높이나 거센 정도에 대해 별다른 기술이 없어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없지만, 3,600㎡ 면적의 땅에서 불길이 솟았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규모가 가장 컸던 2곳 모두 영국 일간지 데일리스타가 우리 돈으로 37조 원의 원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한 그 지역에 포함된다. 기록 속의 지화와 데일리스타의 보도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조선시대 발생한 지화는 함경도 북부와 경상도 영해부에 집중되는데, 함경도에서는 몇 개 부(府)에서 고루 발생한 반면, 경상도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인 영해부에서만 발생했다. 현종 15년인 1674년 발생한 지화도 영해부였다. 1월 24일 첫 번째 기사는 남면 송현에서 땅불이 나 연기가 치솟았는데, 흙과 돌이 달구어져 손발을 댈 수 없었으며, 그 땅의 길이가 8자, 너비는 1자5치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화가 집중되었던 이곳은 경제성이 없어 중단하기는 했지만, 석유의 매장이 확인된 포항과 근접한 지역이어서 원유 매장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공연한 기대를 갖게 한다.

물론, 기록 어디에도 유전과 관련 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다만 정황이 그렇고, 현재에도 유전 가능성이 거론되는 지역과 일치하거나 인접지역이어서 더욱 그럴 뿐이다. 아직 북한 당국은 평양과 서해안 일대의 석유 부존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정부도 아는 바 없다고 밝혀 보도내용의 진위는 아직 확인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부 언론이 걱정하는 것처럼 핵개발이나 군비로 쓰이지 않게 할 안전장치가 마련된다면, 아무쪼록 양질의 원유가 쏟아져 북한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