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태양의 후예 특전사 원조는 조선시대 “체탐정군”

「조선왕조실록」 -  전함 2척 고군산도(古群山島) 인근, 식량·식수 요청

출처 :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 공식 스틸컷

국민배우 송중기·송혜교 주연의 KBS-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이하 태후)」가 지난 14일 16회를 끝으로 종영됐으나, 관광객과 화장품 수출이 급증하는 등 제2의 한류 붐을 예고하며,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태후는 화려한 볼거리와 탄탄한 스토리로 방송 초반부터 시청률 30%대를 달성하며 돌풍을 예고했었다. 횟수를 더할수록 시청률이 높아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태후는 “비오는 날은 치맥이지”라는 여주인공의 대사 한마디에 중국의 치킨집을 마비시켰던 지난 2013년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 그대)」 이상의 경제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별 그대의 총수익은 5300억 원으로, 다른 업종에 미치는 승수효과까지 포함하면 이 드라마의 경제적 효과는 1조원을 능가하며, 이는 중형 승용차인 소나타 2만1495대를 수출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로 태후 방송 이후 여주인공 강모연 선생 역의 송혜교가 사용한 립스틱은 지난해 3월 보다 360%가 증가했고, 유시진 대위 역의 송중기가 마신 홍삼제품은 방송 이전인 1월 보다 무려 1,000%가 늘어나는 등 종영되기도 전부터 별 그대의 여러 가지 기록을 넘어서고 있어, 업계에서는 경제효과가 총 3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태양의 후예 포스터 이미지
출처 :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공식 포스터

태후 열풍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일 제5차 문화융성위원회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그야말로 콘텐츠산업과 제조업의 동반성장 효과를 보여주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모범사례”라고 평가했으며, 이에 앞서 지난달 2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서도 “좋은 문화콘텐츠 하나가 커다란 경제·문화적 가치를 낳는다.”고 평가했을 만큼, 우리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우리나라와 동시 방영된 중국에서는 한 신문이 어린이가 이 드라마를 보다 녹내장에 걸린 사례를 보도했는가하면, 공안당국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를 통해 “TV 드라마는 실제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 시청은 위험할 수 있고, 법률적 리스크도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을 만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같은 태후의 인기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하는 빠른 진행과 톡톡 튀는 대사,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등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적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특전사도 한 몫을 했다는 평가이다.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 유럽 호주 등 32개국에 수출되어 전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는 태후의 한 축인 우리나라 특전사의 역사는 언제부터 일까. 조선시대만 보면, 체탐인(體探人), 착호군(捉虎軍), 장용영(壯勇營) 등을 특수부대로 볼 수 있는데, 해외 분쟁지역에 파견되어 재난구조와 대테러작전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활동과 게릴라전을 벌였던 체탐인이 가장 유사할 것으로 생각된다.

체탐인 또는 정탐자(偵探者)는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대규모 군사작전을 위해 조직적으로 첩보부대를 운용한 것은 세종 15년인 1433년이 처음이라는 견해가 많다. 임금이 직접 체탐자(體探者) 침투를 지시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 이기 때문이다. 1432년 12월 이만주가 이끄는 여진족이 지금의 평안북도 자성지역인 여연을 습격하여 재산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최윤덕에게 여진정벌을 명했다.

「세종실록」 59권 1433년 1월 19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이 최윤덕과 그의 휘하인 김효성, 최치운을 불러 여진정벌을 논의한 내용이다. 임금은 옛날부터 오랑캐의 횡포가 있긴 했지만, 이번 파저강(婆猪江)의 도적들(여진족)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지난번 가족들을 이끌고 와 강가에서 먹고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을 하기에 허락했는데, 우리 백성을 죽이고 잡아가다니, 베는 것 외에는 용서가 안 된다. 이번에 정토(征討, 정벌)하지 않으면, 잘못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며 분개했다. 이에 최윤덕이 이만주는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는 자라고 아뢰자, 임금은 나도 알고 있지만, 적정만 잘 파악되면 하루면 한두 마을은 쳐부술 수 있다며 정탐을 지시했고, 최윤덕은 겨울은 땅이 얼어 적절치 않으니 4, 5월에 정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한 달여가 지난 2월 15일 두 번째 기사는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벙커에서 대통령이 주제하는 안보회의이다. 이날 임금은 의정부, 육조, 삼군 도진무(都鎭撫, 3품 이상의 군 지휘관 및 참모)가 참석한 가운데, 명분부터 보안유지, 전술까지 여진족토벌작전 수립을 위한 끝장토론을 벌였다. 비밀회의로 진행된 이날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영의정 황희는 납치된 주민과 가축을 돌려보내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토벌할 것을, 좌의정 맹사성은 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국경을 굳게 지켜서 스스로 자복하게 하자는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는 제안을, 우의정 권진은 납치된 주민들이 돌아오면 적진의 상황을 들어보고 토벌계획을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 이조판서 이조, 호조판서 안순은, 형조판서 정흠지, 호조참판 심도원, 형조 좌참찬 허성 등의 순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실록의 기록 분량으로 보아 자정을 넘겨 심야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날 회의에서 체탐부대 창설의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 있다. 동지돈녕부사 조뇌는 사람을 보내어 술을 전하고 관대한 은혜를 베푸는 척하면서 내부 사정과 도로 등을 파악한 뒤 경계가 소홀한 틈을 기다려 기병으로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병조 좌참찬 정연도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 우리 백성들의 귀환을 협상하는 사이 그들 본거지의 산천형세와 용병의 규모, 훈련정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금은 도승지 안숭선에게 비밀을 유지하고 토의된 내용은 면밀히 검토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했다.

2월 28일 세 번째 기사는 토벌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체탐인 침투를 논의 한 내용이다. 임금은 역대 전쟁에서 그랬듯이 체탐자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체포되면 우리 정보가 흘러 들어가 위험해 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이순몽, 성억 등은 이 일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니 담당 장수로 하여금 사람을 모집하여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게 해야 한다고 답했다. 황희, 맹사성 등의 정승들은 고정간첩을 보내는 것은 저들과 언어와 풍습이 달라 매우 위험하다. 적임자를 다시 선발해 보내자고 했다. 이에 임금은 정탐자를 보내어 산속에 흩어져 있는 여진족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를 알아내어 공격하기로 하고 절제사가 권모와 지략이 있는 자를 비밀리에 선발하여 침투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라고 명했다.

1433년 4월 10일부터 10여 일 간 압록강 중하류지역에서 있었던 1차 여진정벌은 첩보전의 승리였다. 3월 24일 첫 번째 기사는 공격일자를 확정하기 위한 마지막 작전회의였다. 절제사 최윤덕이 호군 박원우을 조정에 보내, 당초 기습일자로 정한 4월 10일은 아직 춥고, 여진족들도 20일 이후에나 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로 내려 올 것이니, 이때를 노려 기습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긴급회의를 열어 보고내용을 검토한 결과, 이미 대군이 준비태세에 있고, 그곳이 추운 지방이지만, 4월말이면 잎이 무성하고 남기(嵐氣, 산악지대 안개)가 심해 시야확보가 어려우며, 토우(土雨, 황사로 인한 흙비)가 있을 수 있다. 계획대로 시행한다는 결정이었다. 적정은 물론, 계절적 기후조건까지 고려한 작전계획이 대승을 거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왕세종 스틸 이미지
출처 : KBS2 드라마 「대왕세종」공식 스틸컷

1차 여진정벌 이후에도 체탐활동이 계속되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세종이 특히 관심이 많았고, 적절히 활용했다. 「세종실록」 77권 1437년 5월 28일 두 번째 기사는 뛰어난 체탐전략으로 전과를 올린 이숙림을 치하하고, 일선에 체탐지침을 시달한 내용이다. 임금은 평안도 절제사에게 이숙림의 전과를 보고받고 매우 기뻤다. 체탐 참여자 모두에게 상을 내리겠다. 그러나 공을 세우기 위해 적진 깊숙이 침투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부터 체탐은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하고,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상책이었다. 만약 적진에서 적을 만났을 때 세가 불리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임기응변을 다하여 빠져 나와야 한다. 적정을 정탐하는 일은 아무리 자주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경이 판단하여 시행토록 하라 명했다.

압록강 너머 5, 60리까지 체탐인을 보내 정탐하는 임무가 일상화 되면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첩보도 있었지만, 적과 교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순찰시간에 사냥을 하고 돌아와 허위보고를 하는 근무기강 해이까지 부작용도 많았다. 6월 9일 두 번째 기사는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임금이 주의를 준 내용이다. 지난달 강계의 이숙림과 창성의 김장은 적진 깊이 들어가 전과를 올렸으나, 지난해 봄, 가을에 파견된 자들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적진 5,60리까지 척후(斥候, 정찰)를 보내어 항상 정탐하되, 척후는 지름길 대신 숲속으로 다녀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길목에는 2, 3인 1조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복하여야 한다고 임금이 직접 명을 내렸다. 세종 22년인 1440년 5월 29일 두 번째 기사는 관리감독이 소홀하여 체탐인이 근무시간에 제 마음대로 사냥이나 한다는 내용이고, 세조 9년인 1463년 2월 6일 두 번째 기사는 체탐갑사 최유의가 이끄는 7명이 교전을 벌여 4명이 적에게 생포됐다는 내용이다.

임금이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체탐을 지시한 내용부터 경계근무를 소홀히 한 체탐인의 전출명령까지 무수히 많은 기록이 있지만, 비밀업무를 취급하는 특수부대이어서인지 조직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세종 28년인 1446년 1월 4일 네 번째 기사가 체탐부대 편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사는 의정부가 임금에 건의한 내용이다. 체탐인들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고생하는 만큼, 보상받아야 마땅하다고 상께서 명한 바 있다. 체탐인은 강변지역에 근무하는 군사 중에서 충원된 갑사(甲士, 무예가 출중한 정예 기간병)와 정군(正軍, 조선 초 현역병)으로 1처(處) 10명을 정원으로 평상시는 1일 2교대, 비상시는 교대 없이 근무한다. 강변(압록강)지역에 근무하는 540명 중 409명이 체탐정군(體探正軍)으로 3년마다 50명 중 근무일수가 가장 많은 1명씩 총 8명을 뽑아 6품 이하 산관직(散官職, 명예직)을 하사하는 것이 좋겠다.

실록에는 체탐인, 패두(牌頭, 정찰단위 소규모 조직의 장), 정군(正軍), 갑사(甲士), 군관(軍官) 등으로 호칭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계급이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테러가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채 고통 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IS(이슬람교 수니파 무장테러단체)가 보복테러 대상으로 제시한 62개국 중에 하나이다. 더 이상 테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국가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특수부대원들이 국가의 안녕과 세계평화를 위해 태양의 후예 유시진(송중기 분) 대위 보다 더 멋진 활약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