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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한·이란 1300년 인연, 제2중동 붐으로 “활짝”

「조선왕조실록」 -  세종 때까지 공식행사 초청 송축사 하기도

신라와 페르시안의 교류관련 이미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이란을 국빈 방문한 이후 다양한 분야의 양해각서 체결과 실제계약이 속속 성사되고 있어 제2의 중동 붐을 예고하고 있다. 순방기간 동안 박 대통령을 수행한 123개 대·중소기업은 이란기업들과 1대1 비즈니스를 벌여 5억4천만 달러의 계약고를 올렸고, 양국의 장관과 국책은행장들은 66건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역대 대통령 세일즈외교 중 최고의 성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종범 경제수석은 발표된 성과는 계약이 확실시 되는 것만 간추린 것으로 3일 동안 양국의 장관과 국책은행장들이 66건의 양해각서 체결을 위해 협정문을 다듬고 교환하는 과정은 장대한 세리머니였다고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일 국무회의에서 양국 간 교역과 투자의 확대는 물론, 에너지 신산업과 신성장 동력분야로 경제협력을 다변화하기로 합의한 사실을 소개하며, 이번 순방을 계기로 제2의 중동 붐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특히 박 대통령은 2일 테헤란 밀라드타워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이란 문화공감공연」을 관람하는 자리에서 한국의 고대국가인 신라 공주와 이란의 고대국가인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해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놀라움을 넘어 신비스럽기까지 한 1,300여년에 이르는 양국의 인연을 강조한 박 대통령의 언급으로 역사·문화적 동질감과 함께 문화교류 확대의 당위성을 시사했다는 평가이다.

이날 소개된 이야기는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에 나온다. 페르시아 시대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11세기에 필사했는데, 원본은 영국 대영박물관 희귀문서실에 소장 중으로 전체 800여 쪽 중 500여 쪽이 바실라(신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2010년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를 포함한 한국, 이란, 터키 3개국 학자들이 「쿠쉬나메」를 번역 · 분석할 수 있도록 대영 박물관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번역된 내용을 보면, 약 1300년 전 페르시아 왕자 아비탄이 정적인 쿠쉬를 피해 황금의 땅 바실라로 망명하여 그곳의 공주 프라랑과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프레둔이 쿠쉬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이란어로 바는 더 좋은(better)의 의미로 바실라는 신라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풀이했다.

박 대통령은 이란 현지 연설에서 신라 유적에도 페르시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소개했다. 경주에는 신라의 양식과는 확연히 다른 유적이 여럿 있다. 경주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장식보검과 구정동 출토 모서리기둥, 괘릉(원성왕릉) 무인상 등이 그것인데, 지난 2014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환교수로 재직했던 해상실크로드 권위자인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 역사학과 교수는 한눈에 알아보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인상 이미지
경주시 외동읍 원성왕릉 입구에 있는 무인상 : 서역인을
닮은 것으로 봐 신라와 고대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
시아 간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경주 계림로 보검 이미지1경주 계림로 보검 이미지2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 :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보수기 교수의 방문으로 그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의 상당부분이 해소됐다. 경주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35호 장식보검에 새겨진 물결, 나뭇잎, 원 등의 문양이 특정할 수는 없지만,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축해 왔는데, 보수기 교수는 페르시아 사산왕조(BC 651~AD 226) 때 유행했던 보석장식과 일치하고, 경주 구정동 방형분에서 출토된 모서리기둥에 새겨진 무인상이 들고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막대기도 격구(폴로)채로 폴로의 원조국인 페르시아에서 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괘릉 무인상의 조각기법, 옷자락, 들고 있는 칼 등이 이란 남부 시라즈 근교에 있는 낙쉐르탐 무인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들 유적 중 모서리기둥 무인상이 들고 있는 막대기가 격구채라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대목이 「쿠쉬나메」에도 나온다. 바실라로 망명한 바브틴 왕자가 그곳의 타이후르 왕과 격구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무인의 외모나 복장도 서역인과 가까워 「쿠쉬나메」와 보수기 교수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막연히 짐작되어 왔던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도 회회인(回回人,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난 2014년 울산 처용암도 방문했던 보수기 교수는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는 설명을 듣고 무척 놀라워했다. 신라 공주와 결혼한 페르시아 왕자 바브틴이 물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며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우연으로 보기에는 일치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고려시대에는 이란인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아랍인을 통칭했던 대식국(大食國) 또는 회회인(回回人)에 관한 기록이 수없이 많다. 충렬왕 때 지어진 향악곡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지난 2008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일반에 널리 알려진 쌍화점(雙花店, 만두가게)의 남자 주인이 회회인이다. 회회인 주인이 만두 사러 온 여인의 손목을 잡으며 유혹하자 여인이 호응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제법 많은 회회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기둥 무인상 이미지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기둥 무인상 : 서역문화와의
영향관계를 보여준다.

「고려사」에는 이 보다 앞서 헌종 15년인 1024년 대식국인 100여명이 임금을 알현하고 토산품을 진상하자 상이 기뻐하며 성대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금, 은의 보석과 옷감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해인 1025년에도 하선과 라자 등 100여명이 임금에게 토산품을, 정종 6년인 1040년 11월에는 대식국 무역상 보나합이 수은, 용치(龍齒, 전차나 수레 등을 막기 위한 장애물), 점성향(占城香, 베트남 향신료)을 바치자 임금이 후하게 대접할 것을 명했다는 내용이다.

충선왕 2년인 1310년 10월에는 회회인 민보를 평양부윤(종2품 지방관) 겸 존무사(存撫使, 지방수령 감시와 민생을 살피기 위해 파견하는 관료)로 임명했다. 민무는 귀화한 회회인으로 충렬왕 20년인 1294년 장군이 된 이후 1299년 대장군, 1301년 대호군, 1305년 상호군에 올랐으며, 네 차례나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공민왕 22년인 1373년 3월에는 응방〔鷹坊, 매(鷹)와 사냥을 담당하는 관청〕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대신들의 보고가 잇따르자 송나라의 신임이 두터운 회회인을 책임자로 임명하려 했으나, 조인규 등이 강력히 반대해 중지했다. 이밖에도 회회인 등용에 관한 기록이 몇몇 더 있는 것으로 미루어 관직 진출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는 당시 최대 규모의 무역항이었던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개성에 집단촌을 형성해 거주했는데, 예궁이라는 이슬람 사원을 지어 기도하고 코란을 낭송했다는 기록도 있어 많을 때는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회인들은 상업 외에도 광산업이나 보석세공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1276년 회회인 알 사마리아가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회회인들의 채광허가 요청이 자주 눈에 띤다. 태조실록 13권 1407년 1월 17일 첫 번째 기사는 일본 사자(使者)가 소개한 회회 사문(沙門, 승려) 도로가 처자와 함께 조선에 살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승낙했다는 내용이다. 5년여가 지난 1412년 2월 24일 금강산, 순흥, 김해의 수정 채취허가를 받았던 도로가 조선에는 산악지역이 많아 진귀한 보화가 많이 매장되었을 것이다. 전국을 두루 다니며 탐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얻을 것이 많을 것이라며, 채굴허가를 요청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 한 달여가 지난 3월 29일 경상도관찰사 안등은 도로가 세금으로 낸 수정 3백 근(斤)을 조정에 보냈다.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도로가수정을 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귀화 외국인들에게 거주비 일부도 지원해 준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 1416년 5월 12일 세 번째 기사는 귀화인들에 대한 경비를 없앤다는 내용이다. 이날 호조는 각사(各司)의 점심제공을 중단하고, 올적합 올량합 왜인 회회인 등의 향화인으로 녹(祿)을 받고 거실(居室)을 가진 자의 월료(月料)를 중단하자고 건의했고,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이 기록만으로는 녹이 관료들이 받는 봉급인지 귀화인들에게 주는 정착지원금인지 판단할 수 없으나, 집이 있는 자는 더 이상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때까지는 일정금액을 지원해 온 것이 확실해 보인다.

세종 재위 시에는 즉위식에 초청될 만큼 지위가 더욱 향상되었다. 「세종실록」 1권 총서는 세종 즉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태종의 명으로 임금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들이 먼저 하례를 올리고 다음으로 성균관 학생, 회회노인(回回老人), 승도들도 참여하였다. 즉위년인 1814년 9월 27일 세 번째 기사는 종묘에 배알한 뒤 조하(朝賀, 경축일 신하들이 임금에게 하례함)하는 의식절차를 정한 것이다. 통찬(진행자)이 국궁, 사배, 흥, 평신이라 창하면, 관원들은 허리를 굽혀 절을 사배하고 일어나 허리를 편다. 다음으로 승도와 회회인들이 송축(頌祝)을 끝내면 통찬이 예가 끝났음을 알리고, 임금이 좌에서 내려올 때 풍악을 울린다. 이것만으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다문화사회인 요즘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랍다.

고려 때부터 벽란도와 개성에 집단촌을 이루고 살았던 회회인들은 조선 개국 이후에도 여전히 이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1419년 5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이 개성에 갔을 때 일이다. 임금이 금교역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신 후 수레를 타고 개성에 이르니 유휴(留侯, 정2품 지방관) 한옹과 부유후(副留侯) 이적이 지역원로와 회회인들을 인솔하고 영빈관에 나와 맞이했다. 지역원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예조가 회회인을 조회 주요 참석자로 정한 이후 조정의 크고 작은 행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이들은 세종 9년인 1427년 예조의 회회 기도의식 폐지를 계기로 기록에서 거의 사라졌다. 「세종실록」 4월 4일 네 번째 기사는 예조가 양반가의 호화결혼식을 규제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인데, 이때 회회교도(回回敎徒)에 대한 건의도 함께 했다.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 백성들과 달라 사람들이 우리 백성이 아니라고 결혼하기를 꺼린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우리 의관을 해야 하고, 조회 때 회회 기도의식을 폐지함이 마땅하다. 이날 이후 회회인에 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은 의복이나 언어, 풍습이 우리 백성에 동화되어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회회인 기록은 사라졌지만, 회회역법(回回曆法)과 회회청(回回靑, 도자기에 쓰는 푸른색의 물감으로 아라비아에서 수입) 등은 여전히 인기였다. 1443년 7월 6일 다섯 번째 기사는 서운관에서 회회역법의 정확성을 보고한 내용이고, 1445년 3월 30일 네 번째 기사는 동부승지 이순지가 저술한 「제가역상집(諸家歷象集)」 발문으로 회회력 응용을 밝히고 있다. 「세조실록」 30권 1463년 9월 5일 세 번째 기사는 전라도 경차관 구치동이 강진에서 회회청을 구했다는 보고이고, 「광해군일기」 139권 1619년 4월 17일 첫 번째 기사는 그동안 여러 차례 수입하라 명했지만, 아무도 들여오지 못했는데 이홍규가 정성을 다하여 수입하여 왔으니 매우 가상하다. 후하게 시상하라는 명이다.

서울과 테헤란에는 각각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고, 30여 년간 계속된 국제제재 속에서도 지난 2006년부터 1년여 간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시청률 91%, 2008년 방영된 「주몽」은 85%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1300여년의 인연과 역사·문화적 공감대가 있어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의 국빈방문으로 물꼬를 튼 한·이란 관계가 고려 때보다 더 활짝 꽃피우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