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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조선시대, 지진 더 이상 공포 아닌 극복의 대상

 「중종실록」 - 이럴 때일수록 한마음으로 경계하고 마음 가다듬어야

ytn뉴스 캡쳐 이미지
지진 덮친 경주 피해 잇따라…기와·외장재 '와르르'(사진출처: 2016. 9. 13. 18:00 ytn뉴스)

정부가 지난 12일 진도 5.8 규모의 본진에 이어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가운데, 시민들과 관계 기관·단체 임직원, 자원봉사자들이 피해시민들의 심리적 안정과 빠른 복구를 위해 구슬땀을 쏟고 있다.

이번 특별재난지역 선포로 공공시설은 5대 5, 사유시설은 7대 3이던 복구비의 국비와 지방비 비율이 최고 80%까지 국비로 지원되고, 해당 지자체에 특별교부세를 지원할 수 있는데, 이번 경주시에는 20억 원이 지원된다. 피해 주민들에게는 국세·지방세를 비롯한, 보험료 30~50%, 통신요금 12,500원, 주택용 전기료 100%, 도시가스 1개월이 감면된다.

또한 농·어업인에게는 영농·영어자금을, 중소기업에는 시설·운전자금을 우선 융자 또는 상환을 유예하여 피해 주민들의 생활안정화와 피해복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지진은 규모도 컸지만,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긴 여진으로 시민들이 쉽사리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경주시내 약국에는 가만히 누워 있어도 집이 흔들리고 공사장 소음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려 청심환이나 신경안정제를 찾는 손님이 평소 보다 4~5배 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계기(計器)를 이용한 지진관측이 처음 시작된 이후 물리적 피해를 준 큰 지진이 없어 안전지대로 여겨져 왔으나, 각종 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면, 한반도는 결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이와 관련, 기상청 국립기상연구소가 지난 2012년 흥미로운 자료집을 발간했다. 서기 2년부터 1904년까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 역사문헌에 나오는 지진기록을 정리한 「한반도역사지진기록」이다.

그런데 왜 국립기상연구소는 2~1904년까지의 문헌기록만 조사했을까. 「삼국사기」와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첫 지진기록은 유리명왕(瑠璃明王) 21년인 서기 2년 8월 고구려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이때부터 계기(計器) 관측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4년까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자료집의 발간의의에서 밝힌 것처럼 같은 지각 판 내에서의 대규모 지진은 수백~수천 년 간격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계기 관측이 이루어진 100여년은 한반도 지진활동의 특성이나 향후 지진위험도 등을 분석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00여년에 이르는 문헌기록은 가장 유용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이 자료집에서는 서기 2~1904년까지 한반도에서는 2,161회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진도 4이하가 대부분이고 진도 5 이상이 약 5%, 인명피해가 발생하거나 성첩(城堞)이 무너지는 진도 8~9는 약 1%가 안 되는 15건이었다. 그런데 국립기상연구소는 문헌상의 서술만을 보고 어떻게 등급을 부여할 수 있었을까. 피해규모나 발생횟수에 관계없이 당시 상황을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창과 벽이 흔들거림 등으로 서술했으면 4, 땅이 크게 진동, 담장과 지붕이 크게 흔들림 등이면 5, 기왓장이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 집 밖으로 뛰어 나오면 6, 큰 길이 갈라지고 사람과 가축이 죽으면 8~9로 진도 결정 값을 정하여 이를 기준으로 했다.

문헌기록으로만 보면, 진도 8~9에 이르는 첫 강진은 서기 89년 6월 백제에서 발생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증보문헌비고」는 지진이 있어 민가가 쓰러지고 죽은 자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이후 100년 10월에는 경도(京都, 현 경주)에서, 304년 9월 역시 경도에서, 502년 12월 고구려에서, 510년 5월에는 신라에서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지진은 사망자수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데, 신라 혜공왕 15년인 779년 3월 경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100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례적인 경우로 받아 들여 진다.

지진 이미지

우리나라의 재이(災異)와 사상을 연구한 「한국과학사상사」(박성래 지음)는 이날 지진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같은 해 2월에는 강주에서 땅이 꺼지면서 큰 연못이 생겼으며, 3월 지진 후에는 금성이 달에 들어갔고, 이듬해 1월에는 누런 안개, 2월에는 흙비, 4월에는 반란이 일어나 임금과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사망자 수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온갖 재난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임금의 부덕함과 이를 통한 민심이반 등 반란의 명분을 쌓으려는 일련의 음모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지진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있다. 「단종실록」1454년 12월 28일 두 번째 기사는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 해괴제(解怪祭, 기이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천지신명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지내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이날 지진은 초계, 선산 등 경상도 3개 군(郡), 전주와 익산 등 전라도 29개 지역, 제주도 3개 지역에서 발생하여 담과 가옥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단종은 재위 2년째인 이 해에 8번의 지진이 발생하여 8번의 해괴제를 지냈다.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해괴제를 지내게 하여 스스로 자신의 무능과 부덕함을 드러내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의심되는 대목이다.

과학 분야 업적이 가장 많은 세종대왕도 지진이나 지함(地陷, 일명 씽크홀로 땅꺼짐 현상)같은 재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원인규명이나 피해조사 보다 해괴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눈에 띤다. 해괴제에 대한 기록을 중종 이후로는 찾아 볼 수 없는데, 이로 보아 지진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중종실록」1518년 5월 15일 세 번째 기사가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세 번의 지진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떨어졌으며, 도성 안 사람들이 놀라 뛰어 나와 밤새 제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숙을 했다. 지난 12일 지진과 그 이후 여진에 놀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에서 밤을 지새운 경주시민들의 공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가옥의 벽체가 부서지거나 일부가 붕괴하고 암석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인 진도 8의 지진이었지만, 장마가 겹쳐 사망자를 낸 지진도 있었다. 명종 1년인 1546년 5월 23일 황해도에서 경기, 충청도 충주까지 이어지는 지진에 이어 평안도 전역,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두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까지 내려 경상도 청도에서 산사태로 민가가 파묻히고 3명이 압사했다.

조선시대 지진 중 여진이 가장 길었던 것은 선조 27년인 1594년 5월 14일 경상도 일대에서 발생한 것이다. 「선조실록」일곱 번째 기사는 경상도 각 고을에서 한결같이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간단히 기록했는데, 이날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계속되었다. 26일 2회, 27일 1회, 6월 2일 1회, 3일 3회의 기록이 있는데, 감지되지 않은 약진까지 포함하면, 수십 회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지진을 둘러 싼 책임공방도 자주 눈에 띤다. 선조는 지진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양위할 뜻을 밝혀 대신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선조실록」1594년 6월 3일 세 번째 기사이다. 편전(便殿)에 든 임금이 대신들에게 지진이 일어난 것은 이변 중에 이변으로 대응해야 한다. “내가 왕위에 눌러 앉아 있으면 안 되는데 구차하게 그대로 있어 하늘이 노한 것이다. 경들은 내가 하루 속히 물러날 수 있도록 조속히 처리하라.” 이에 영부사 심수경이 “열흘 사이에 지진이 두 번 발생한 것이 이변이긴 하지만 대응하면 그뿐인데, 어찌 황망한 전교를 내리십니까.” 심수경이 중국이 상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알쏭달쏭한 논리를 내세우며 만류하자 못이기는 척 물러섰다.

임금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단순한 착오였는지 알 수 없지만, 관상감의 축소보고가 들통 나 문책을 당한 일도 있었다. 같은 날 네 번째 기사는 동부승지 이수광의 보고로 지난밤과 새벽녘 한 차례씩 지진이 있었는데, 한번만 보고한 관상감을 추고해야 한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대로 하라 전교한 내용이다.

인조 21년인 1643년 7월 24일과 숙종 7년인 1681년 5월 11일에는 동해안에서 해일을 동반한 지진이 발생했다. 「인조실록」의 이날 기사는 울산부(蔚山府, 현 울산광역시)에서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쳤으며, 바다 가운데서 큰 파도가 일어 육지로 1보 또는 2보나 나왔다가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는 내용이다. 1보는 약 1.8m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숙종실록」도 강원도 양양과 삼척에서 발생한 지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양양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을 쳤고 설악산 신흥사와 계조굴(繼祖窟) 큰 바위들이 무너졌으며, 삼척에서는 동쪽 능파대 수중의 암석 10여 장이 부러지고 바닷물이 조수(潮水)처럼 밀려 나갔는데, 평소 물에 잠겼던 곳이 5, 60보나 노출되었다. 기술 내용만 보면, 해일이 육지로 온 것이 아니라 심해 쪽으로 100여 미터나 빠져 나간 것이다.

순조 10년인 1810년 1월 16일에도 대규모 지진이 있었다. 같은 달 27일 실록의 첫 번째 기사가 함경도 감사 조윤대가 지진에 대해 보고한 내용인데, 같은 달 16일 명천, 경성, 회령 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집이 흔들리고 성첩이 무너졌으며, 산사태로 여러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었다. 같은 날 부령부에서도 지진이 나 민가 38호가 무너져 많은 사람과 가축이 죽었다. 이번 지진은 16일부터 29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적게는 하루 5, 6번, 많게는 8, 9번씩 계속되어 곳곳에 땅이 꺼지고 샘이 말랐다. 의심스러운 내용이 많아 각 고을에 다시 보고하게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조윤대 감사는 참으로 놀라운 재변이니 사망자 가족에게는 휼전(恤典, 정부의 이재민 지원)을 내려 각별히 돌보아 주고, 가을까지는 온갖 잡역을 경감해달라는 건의도 잊지 않았다.

「중종실록」1536년 10월 1일 세 번째 기사는 훙문관 부제학 성윤의 상소이다.

재변(災變)은 어느 시대이든 있어 왔고 대응하는 방법도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랐다. 최근 경기도 일대에서 땅이 꺼지고, 도성 안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불이 나는 재변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상하가 한마음으로 재변을 경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오늘부터라도 대소 신료들이 정사에 더욱 매진하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자.

480년 전 상소이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피해 시민들을 위로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실천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지진 이전의 일상을 되찾을 것으로 믿는다. 또한 수백 년을 축적해 온 지진에너지가 언제, 어디로 표출될지 모르지만, 지혜를 모아 대비한다면, 그렇게 두려워할 일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