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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현존 세계 최강 자주포 K9 시조(始祖)는 “문종화차”

「조선왕조실록」 - 1451년 문종 직접 설계ㆍ제작, 한 해 동안 700대 배치

풍운아 홍길동(신동우) - 이미지협조: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신찬섭

1451년 3월 15일(음력 2월 13일, 이하 음력)은 조선 제5대 임금인 문종이 직접 설계ㆍ감독한 당대 세계 최강의 자주포 또는 이동식 로켓발사대인 화차(火車)를 완성한 날이다. 이로부터 566년이 흐른 지난 3월 2일 각 언론에는 우리나라가 만든 세계적 수준의 무기 중 하나인 K9 자주포가 북유럽에 수출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날 언론보도에 따르면 방위사업청과 KOTRA가 K9 48문 총 1억4천5백만 유로(한화 1,915억원) 어치를 2025년까지 핀란드에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는 것. 국방과학연구소 주도로 한화테크윈 등 국내 100여개 업체가 참여해 개발한 이 자주포는 지난 2000년부터 본격 생산을 시작해 2001년 터키, 2014년 폴란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수출이다. 특히 이번은 진입장벽이 높기로 유명한 북유럽 방산시장을 대상으로 이룬 성과여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국제 무기전문가들은 세계 최강인 독일 PzH-2000과 성능은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절반인 40억 원대여서 국제 경쟁력이 충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자주포의 공식명칭은 K9 155㎜ 자주 곡사포로 국방과학연구소가 고도의 기동성과 생존성이 요구되는 21세기 전장(戰場)환경에 부응하기 위해 10여년의 연구개발 끝에 독자 개발한 신개념 포병무기이다.

  • 출처:국방과학연구소

    출처:국방과학연구소

포병 운용개념을 바꾼 것으로 평가되는 이 자주포는 자동 사격통제, 자동 송탄과 장전, 고속이동 중 1분 이내, 15초 내에 3발까지 발사가 가능하고, 사거리가 40㎞ 이상이다. 고성능엔진과 자동변속기를 장착해 시속 6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어 현대전에서 요구되는 SHOOT&SCOOT(사격 후 진지변환) 작전수행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의 방위산업 수준을 비밀로 하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내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시대나 무기는 국가의 안위와 존립의 문제였던 만큼,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그 나라의 방위산업 수준이 곧 과학기술의 척도로 받아들여지는데,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물려 준 과학DNA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K9이 진입장벽이 높기로 소문난 북유럽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이자 최강의 화차(현재의 자주포)를 만들었던 조상들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5종의 화차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문종이 직접 설계ㆍ감독해 완성한 ‘문종화차’가 으뜸으로 꼽힌다. 문종 1년인 1451년 2월 13일 두 번째 기사가 그것인데, 차() 위에 가자(架子, 시렁 또는 거치대)를 설치하고,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4발을 동시에 쏠 수 있는 총) 50개를 장착하여 한번에 200발을 발사하는 화차를 만든 것. 평탄한 곳은 두 사람이, 진흙도랑이나 조금 경사진 곳은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뒤에서 밀면 쉽게 움직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임금이 직접 지수(指授, 지시하고 가르쳐 줌)한 것임을 실록은 확실히 하고 있다.

제5대 임금인 문종은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기간과 병약함 때문에 존재감이 낮았지만, 무기와 군사분야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날 임금은 화차의 완성을 발표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차의 활용과 향후 배치와 운용계획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혔다. 화차는 무기인 만큼 평상시에는 쓸모없는 기구이다. 사용하지 않으면 망가지게 마련이니 각사(各司, 서울 소재 관청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나누어 운반용으로 사용하고, 사변이 발생하면 즉시 화포를 거치하여 사용하라. 요즘도 일부 중장비나 차량을 유사 시 징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처럼, 민ㆍ군 겸용으로 운용했다.

이어 임금은 “서울은 군기감에서 50대를 제작하여 배치하고 평안도 의주와 안주, 함길도 길주는 함길도 도절제사 본영에서 20대씩을 제작ㆍ배치하되 여기에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시험해 보고 의정부, 병조의 당상(堂上), 군기감 제조(提調)는 그 결과와 개선책을 보고하라”고 명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적기투입이 관건인 무기운용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한 조치였다.

무기 연구개발 절차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합참 또는 각 군 소요제기 → 국방부‧방위사업청 승인 → 국방과학연구소 연구개발 → 방위사업청 시험평가 → 군() 운용시험평가를 거쳐 생산에 들어가는데, 이때도 대체로 비슷했다. 문종화차 발표 한 달여 전인 1월 16일 첫 번째 기사가 운용시험평가에 해당된다. 이날 임금은 모화관에서 700명의 병사가 벌인 전투훈련을 참관한 뒤 화차와 재래식 무기인 편전의 위력시험을 가졌다. 80보 앞에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추인(芻人, 무예연습용 인형)을 세우고 화차와 편전을 쏘았는데, 화차만 관통했다. 임금은 총평을 통해 “기계는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무사들은 화차를 능숙하게 다루었다.”며 흡족해 했다.

일반적으로 자주포나 전차, 장갑차는 외형이 비슷해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렵다. 자주포는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곡사포를, 전차는 2~3㎞ 이내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직사포를, 장갑차는 병력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두꺼운 장갑(裝甲)을 갖춘 것이 특징인데, 주된 기능만 보면 문종화차는 자주포인 K9에 가깝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차는 최무선의 뒤를 이어 아들 최해산이 1409년 완성한 것인데, 아쉽게도 일찍 단종되는 바람에 제원이 전해지지 않는다. 두 번째인 문종화차는 비교적 온전하게 설계도가 전해져 몇 차례의 개량을 거쳐 19세기 초까지 실전에 사용되었다. 차체는 길이 230㎝, 너비 74㎝로, 지름 87㎝의 바퀴가 2개 달린 사람이 끄는 수레이다. 여기에 사전총통은 50개, 중신기전은 100개까지 부착할 수 있는데, 총통을 부착하면 한번에 200발을 쏠 수 있다. 이는 적군 100명의 위력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이 화차의 특징 중에 하나는 바퀴를 차체 아래쪽에 부착하여 수레를 43도까지 기울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장애물이나 언덕 너머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발사각도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었음으로 K9과 같은 자주 곡사포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렇다고 자주포 기능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현대전()에서도 자주포가 근접거리에서 적을 만나면, 직사포를 쏘기도 하고, 장갑차가 기관포를 장착하기도 하는 것처럼, 문종화차도 초보적이긴 하지만, 장갑과 전투기능을 갖추었다. 문종실록 1451년 2월 20일 첫 번째 기사가 그것이다. 의정부와 병조의 당상관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화차 시험발사를 관람한 뒤 평가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를 진행한 군기감 제조 이사임이 참관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사거리나 명중률, 운용방식 등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한데, 다만 생존성이 부족하다. 불붙이는 사람(射手, 사수)을 보호할 수 있도록 차체 좌우에 튼튼한 방패를 부착하자. 이 개선안은 현장에서 채택되어 곧바로 군기감에 전달되었다.

문종은 이 화차를 끊임없이 개량하고 확대배치에 힘썼다. 같은 해 3월 7일 네 번째 기사는 방패를 떼어낸다는 보고이다. 2월 시험평가에서 채택된 방패부착은 실제 운용결과, 넓어진 차체와 무게 때문에 자주포의 생명인 기동성을 크게 떨어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군다나 이 화포의 사거리가 왜군의 조총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길기 때문에 사수가 직접 공격받는 경우는 거의 없어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3월 7일 다섯 번째 기사는 각 지역별 화포 배치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임금이 곡산, 수안, 황주 등의 고을에 화차 20대씩을 제작‧배치할 것을 지시하자 의정부가 반대했다. “신 등이 지난번 논의에서 평양은 변방이 아니어서 화차를 배치하지 않기로 했는데, 곡산 등과 같은 내륙지방까지 필요하겠습니까. 도적들이 내륙까지 이른다면 그 때 만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이에 실망한 임금은 “내가 직접 창작한 것인데, 어찌 이럴 수 있나. 대신들이 화차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푸념을 했다. 눈치 빠른 승지 정이한(鄭而漢)이 나섰다. “신이 얼마 전 의정부에서 그들끼리 논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화차는 매우 유익하다. 감히 어느 적이 화차를 당해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되찾은 임금이 병조에 지시했다. “경중(京中)은 50대, 지난번 거론했던 고을에 함길도 길주를 추가하여 각각 20대씩 제작하고, 각 도절제사의 본영에는 거장(車匠, 군기감 소속 수레제작 장인)을 보내라”

그러나 주된 재료가 목재이다 보니 내구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6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군제개편에 대한 논의이다. 이날 논의가 끝날 즈음 임금이 슬며시 화차제작으로 화두를 돌렸다. “화차를 더 만들고 싶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지…” 그러나 대신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어긋나서 쓸모없게 되니 더 만들기보다는 목재를 마련하여 두었다가 필요할 때 만들자는 것이다. 6월 5일 두 번째 기사도 이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이날 좌찬성 김종서는 먼저 각 지역별 화차 소요대수와 배치 장소를 정한 뒤, 이에 해당하는 목재를 마련하여 잘 보관할 것과 제작기술을 익혀 둘 것 등을 건의했다. 이후로도 화차를 계속 제작해 1451년 한 해 동안 전국에 700대 이상이 배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설계도가 불탔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단종실록 1453년 11월 4일 세 번째 기사는 이조 참의 신석조가 역모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자 아들 수담에게 화차 만드는 책(製車之書)을 불태우게 했다는 것이다. 이틀 후 신석조는 상서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했는데, 화차를 만드는 곳이 전국에 있고 장인도 한둘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설계도를 태웠겠느냐는 것이다.

  • 행주산성(출처 : 문화재청)

    행주산성(출처 : 문화재청)

  • 행주대첩도(출처 : 문화재청)

    행주대첩도(출처 : 문화재청)

신석조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에 하나인 행주대첩은 권율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행주치마 애국심도 중요했지만, 화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3만 명의 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는 조선군은 정규군 2,800여명, 승병을 포함한 의병이 6,000여명으로 누가 보아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왜군의 완패였다. 6천여 정의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공세를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기전발사대와 사전총통을 장착하고, 한번에 100~200발을 퍼붓는 40대의 화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화차는 망암(望庵) 변이중(1546~1611년)이 개발한 것으로, 만석꾼이었던 사촌동생의 도움을 받아 전남 장성군 조양리 백양사에서 제작한 300대 중 일부였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변이중의 그것은 조선 네 번째 화차로 2세대 모델인 문종의 것을 개량한 것이다.

때로는 전쟁이 역사를 바꾸고, 그 전쟁은 신무기가 승패를 가른다. 실없는 생각이지만, 망암의 동생 변윤중(1550~1597년)이 화차개발을 위해 희사한 재산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물론 400여 년 전 화차제작비를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화차가 현재의 자주포 보다 훨씬 더 유용했던 만큼, K9 가격인 대당 40억 원으로 단순 계산해 보면, 300대를 제작했으니 1천2백억 원대인 셈이다. 아직은 멀게만 보이는 자주국방, 과학강군과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먼저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