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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개요 > 역사적 배경 > 이승만정권기 초기 언론통제와 필화사건
사건의 발달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한국의 선거 가능지역에서 총선거안을 가결함에 따라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5·10선거에 따라 제헌국회가 구성되었고 제헌국회는 7월 20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 언론 정책은 미군정의 언론정책을 유지, 구한말 제정되어 일제 때 시행되던 「광무신문지법」과 1946년 5월 19일 미군정이 ‘공산당의 파괴적인 활동을 저지할 필요’에 따라 좌익세력의 언론활동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제정·공포한 「군정법령」제88호를 그대로 적용했다.
이승만정부는 집권 초기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1948년 9월 22일 ‘①대한민국의 국시국책(國是國策)을 위반하는 기사, ②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③공산당과 이북 괴뢰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④허위의 사실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⑤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⑥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서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기사, ⑦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등에 대해 보도를 금지하는 언론정책 7개항을 발표했다. 이는 좌익계열이나 진보적 언론에 대한 통제이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기제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27일 국회 법사위원회는 전문 5개조로 된「국가보안법」 초안을 작성해 본회의에 제출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발의된 「국가보안법」은 소장파 국회의원과 언론으로부터 진보적 정치세력이나 정적을 탄압하는 데 이용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으나,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공포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언론통제를 직접 적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3조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협의, 책동 또는 선전을 한 자’ 등의 조항은 언론자유를 포괄적으로 위협했다. 실제로 이승만정권기 필화사건 대부분이 「국가보안법」 적용을 받았다.
정부수립 직후부터 1949년 초반 사이 이승만정권의 언론통제 정책에 의해 <제일신문>, <조선중앙일보>, <세계일보>, <국민신문>, <대한일보> 등이 정간·폐간되었지만, 이 시기 대표적인 필화사건으로 거론되는 사건은 <서울신문> 정간이다. <서울신문>은 이승만정권에 비판적이었으며 정부에서 발표되는 정보를 소개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결국 <서울신문>은 이승만대통령의 한미방위동맹에 관한 담화를 싣지 않아 1949년 5월 정간되었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통치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냉전체제 속에서 아시아에서의 반공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이승만 정부의 언론통제가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보수언론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정부는 1950년 7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 출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모든 언론기관은 사전검열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52년 3월 19일 「광무신문지법」을 폐기한 후 이승만정부는 몇 차례에 걸친 언론통제 입법 시도끝에 1957년 12월에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은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 조병옥의 밀약 결과로, 선거운동에서의 신문 잡지 등의 불법 이용 제한, 허위보도 금지 등을 포함하고 있어 언론의 선거보도 기능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었다. 언론계는 이 법이 언론통제법이라면서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악법철폐운동을 펼쳤다.
권력강화와 언론통제
6.25전쟁이 휴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회의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로는 재선 가능성이 희박하자 1952년 5월 대통령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백골단·땃벌떼 등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만든 후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제공산당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이승만을 비판하거나 내각책임제를 주도했던 소장파의원 50여 명을 헌병대로 연행했다(부산정치파동). 그리고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한 상황에서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발췌개헌). 이승만은 8월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또한 1954년 5월 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여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국회의원 재적수 2/3를 확보하자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표결 결과 재적 203석 가운데 135표의 찬성으로 개헌선인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 개헌안이 부결되자 자유당은 203의 2/3인 135.33에서 사사오입하면 136이므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선언했다(사사오입개헌).
1952년 대통령제 개헌을 둘러싼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개헌'파동을 겪는 과정에서 신문은 이미 여야로 구분되었다. 이승만정권의 일련의 비민주적 행태는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고 일부 여당지를 제외한 각 신문은 집권당의 횡포와 부정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야당을 대변하는 대표적 신문이었던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과 <경향신문 > 뿐 아니라 이승만정권의 비민주적 국정운영에 대해 중립을 고수했던 <조선일보>나 <한국일보> 등도 정부정책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정부의 언론탄압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5년 <동아일보> ‘괴뢰오식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테러사건’은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언론에 대한 통제가 심해진 시점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1950년대 이승만정권을 유지·강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반공단체나 학생들을 대규모로 이용한 동원정치였다. 이승만은 정치적 난관 극복과 정적(政敵) 제거 및 자신의
위상 제고를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동원하여 국민대회를 자주 개최했다. 이승만은 이 대회를 ‘민의(民意)’라고 강조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궐기대회나 시위에는 대한노총 소속원들, 시민, 공무원 등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거 동원되었지만, 가장 자주 많이 동원된 것은 학생들이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과정에서의 민의(民意)동원, 우마(牛馬) 소동은 관제데모의 극치를 보여줬다.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 사설에 대한 테러사건은 이러한 이승만의 동원정치를 비판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경향신문 > 폐간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를 앞둔 1958년 「국가보안법」 개정과 1959년 <경향신문 > 폐간사건은 자유당정권에 의한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지만 집권당인 자유당이 정권연장을 위해 야당을 탄압하고 언론을 단속할 목적에서 만든 것이었다. 개정된 「국가보안법」제17조 제5항, 제22조 등은 강력한 언론제한 규정을 담고 있었다. 제17조 5항은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허위인 줄 알면서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함으로써 인심을 혼란케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했으며, 제22조는 “제6조 내지 제8조에 규정된 결사, 집단 또는 단체를 위하여 또는 그 지령을 받고 집회하거나 문서, 녹음반, 도화 기타 표현물을 반포하여 공연히 헌법상의 기관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헌법상의 기관이라 함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을 말한다라고 규정되었는데 결국 이 조항은 국회 활동의 비판과 정부의 부패와 실정에 대한 공박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 폐간은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은 사건이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경제는 1957년을 정점으로 원조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났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불만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고 민심의 이반현상은 가속화되었다.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면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 이승만정권은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민주당 장면정권 탄생과 관련이 깊었던 <경향신문 >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경향신문 >은 1959년 4월 30일 폐간되었다가 ‘폐간 57일, 하루 발행, 정간’으로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1년만인 1960년 4월 26일, 4·19가 나고 이승만이 하야한 다음 날에야 신문을 복간할 수 있었다.
임송자(성균관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