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관출장소는 일제강점기 각 세관 산하에 설치된 지방세관기구 중 하나였다. 1905년 5월 25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1907년 인천세관남대문출장소가 설치된 것이 최초이며, 1906년 경의선 개통과 더불어 1909년 7월 29일 탁지부령 제21호로 진남포세관평양출장소의 설치를 공포하고 8월 1일부터 시행한 것이 두 번째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9월 30일 칙령 제362호로「조선총독부세관관제(朝鮮總督府稅關官制)」가 공포되고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이 관제는 1942년까지 29차례의 개정을 거치며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부속 관제로 1910년 10월 1일 고시 제29호로 세관출장소의 명칭, 위치를 정하고 시행하였는데, 당시 세관출장소는 전국적으로 4곳(경성, 대구, 용암포, 평양)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이후 약 30차례에 걸쳐 개정되었으며 대부분 세관출장소의 신설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에 기록된 세관출장소 직원 목록의 분석을 통해 연도별 세관출장소의 설치현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연도 | 1910 | 1911 | 1912 | 1913 | 1914 | 1915 | 1916 | 1917 | 1918 | 1919 |
---|---|---|---|---|---|---|---|---|---|---|
세관출장소 | 4 | 4 | 4 | 17 | 23 | 34 | 35 | 35 | 35 | 35 |
연도 | 1920 | 1921 | 1922 | 1923 | 1924 | 1925 | 1926 | 1927 | 1928 | 1929 |
세관출장소 | 36 | 37 | 47 | 90 | 75 | 68 | 68 | 66 | 70 | 71 |
연도 | 1930 | 1931 | 1932 | 1933 | 1934 | 1935 | 1936 | 1937 | 1938 | 1939 |
세관출장소 | 74 | 74 | 76 | 76 | 74 | 78 | 80 | 80 | 80 | 81 |
연도 | 1940 | 1941 | ||||||||
세관출장소 | 80 | 73 |
강점 초기에는 4개 세관출장소로 운영되었지만, 1913년부터 대대적인 확충이 시작되었고 1923년까지 세관출장소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최대 90개소에 달하였다. 이후로는 소량의 증감을 거치며 운영되다가 1941년 당시에는 73개의 세관출장소가 각지에 운영되고 있었다. 세관출장소의 대부분은 서북 및 동북 국경에 설치되었는데, 해상 국경이었던 남쪽의 주요항구에는 상위기관인 세관이나 세관지서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육상 국경인 압록강, 두만강 지역에는 세관출장소가 지속적으로 신설되었던 것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세관출장소에 관련하여 41개 시설에 대한 240매의 도면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역시 경성, 남대문, 대구세관출장소를 제외하면, 모두 평안북도, 함경북도, 함경남도에 설치된 세관출장소의 도면들이다. 자세한 내역은 다음의 표와 같으며, 경상북도 1개소, 평안북도 17개소, 함경북도 18개소, 함경남도 3개소의 세관출장소에 대한 도면이 확인된다.
명칭 | 운영시기 | 설치지역 | 도면수 |
---|---|---|---|
세관출장소 공통 | - | - | 25매 |
경원세관출장소 | 1913 ~ 1941 | 함경북도 | 2매 |
경흥세관출장소 | 1913 ~ 1941 | 함경북도 | 13매 |
고령진세관출장소 | 1922 ~ 1941 | 함경북도 | 2매 |
구령포세관출장소 | 1935 ~ 1941 | 평안북도 | 3매 |
구읍세관출장소 | 1914 ~ 1941 | 평안북도 | 1매 |
나난보세관출장소 | 1915 ~ 1941 | 함경남도 | 8매 |
남산면세관출장소 | - | 함경북도 | 4매 |
남양세관출장소 | 1929 ~ 1933 | 평안북도 | 5매 |
대구세관출장소 | 1910 ~ 1922 | 경상북도 | 14매 |
동관진세관출장소 | 1922 ~ 1941 | 함경북도 | 2매 |
만포진세관출장소 | 1914 ~ 1939 | 평안북도 | 14매 |
무산세관출장소 | 1913 ~ 1941 | 함경북도 | 5매 |
미타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평안북도 | 1매 |
부흥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평안북도 | 1매 |
삼박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평안북도 | 6매 |
삼봉동세관출장소 | 1920 ~ 1928, 1940 ~ 1941 | 함경북도 | 8매 |
삼장세관출장소 | 1915 ~ 1921, 1929 ~ 1941 | 함경북도 | 5매 |
상삼봉세관출장소 | - | 함경북도 | 3매 |
서강촌세관출장소 | 1916 ~ 1941 | 함경북도 | 1매 |
수구포세관출장소 | 1922 ~ 1941 | 평안북도 | 1매 |
신갈파진세관출장소 | 1915, 1922 ~ 1941 | 함경남도 | 5매 |
신아산세관출장소 | 1914, 1916 ~ 1921, 1925 ~ 1941 | 함경북도 | 5매 |
신천세관출장소 | 1935 ~ 1941 | 평안북도 | 1매 |
양영진세관출장소 | 1923 ~ 1938 | 함경북도 | 3매 |
양평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평안북도 | 1매 |
온성세관출장소 | 1913 ~ 1941 | 함경북도 | 3매 |
용암포세관출장소 | 1910 ~ 1921, 1938 ~ 1939 | 평안북도 | 3매 |
유선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함경북도 | 1매 |
중강진세관출장소 | 1913 ~ 1940 | 평안북도 | 2매 |
창성세관출장소 | 1933 ~ 1940 | 평안북도 | 6매 |
평양세관출장소 | 1910 ~ 1922 | 평안북도 | 6매 |
포삼세관출장소 | 1922 ~ 1941 | 평안북도 | 14매 |
하사지세관출장소 | 1915 ~ 1941 | 함경북도 | 1매 |
하여평세관출장소 | 1923 ~ 1941 | 함경북도 | 5매 |
혜산진세관출장소 | 1913 ~ 1940 | 함경남도 | 5매 |
호하세관출장소 | 1940 ~ 1941 | 평안북도 | 5매 |
회령세관출장소 | 1913 ~ 1922 | 함경북도 | 17매 |
후주고읍세관출장소 | 1915 ~ 1923, 1925 ~ 1936, 1940 ~ 1941 | 평안북도 | 1매 |
훈융세관출장소 | 1913, 1916 ~ 1940 | 함경북도 | 7매 |
세관출장소는 주요 철도나 도로의 국경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청사 1동과 창고 1~2동의 소규모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세관출장소 건축의 특징을 청사의 주요 도면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판1]은 1933년 계획된 남양세관출장소의 배치도이다. 장방형의 부지에 청사 1동과 창고 1동이 배치되어 있다. [도판2]는 1939년의 하사지세관출장소의 신축배치도로, 이 역시 동서로 긴 부지에 청사 1동과 창고 1동, 우물이 계획되어 있다. 다른 세관출장소도 마찬가지로 부지의 형태나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동일하게 청사 1동과 창고 1~2동이 부지 내에 계획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사의 계획 형태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단층 목조 건물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차이로 입면의 마감재료를 들 수 있는데, 입면 계획이 확인되는 세관출장소 청사 39건 중, 9건만이 비늘판벽으로 계획되었고, 30건은 모르타르바름방식으로 계획되었다. 이는 소장된 도면의 시기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으로, 작성연도가 확인되는 32건의 청사 계획 중 1910년대의 것은 1건(회령, 1917)에 불과하고, 1920년대의 것은 3건(신아산,1923, 동관진,1927, 삼봉동,1929)이며,([도판3], [도판4] 참조) 나머지 29건은 모두 1930~40년대의 계획인 점을 고려할 수 있다. 1917년에 계획된 회령세관출장소 청사는 모르타르바름으로 계획된 점이 예외적이나,([도판5] 참조) 이외에 1910-20년대에 계획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와 평양세관출장소 청사([도판6], [도판7] 참조)를 포함하여 5건의 1920년대 청사가 모두 비늘판벽으로 계획된 점은 당시 비늘판벽 마감 방식이 선호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1930년대의 일부 계획에서도 비늘판벽이 사용되고 있는데, 삼장(1935), 신갈파진(1936) 세관출장소 청사에서 확인된다.([도판8], [도판9] 참조) 하지만, 1930년대 이 둘을 제외한 모든 청사가 모르타르바름 방식으로 계획되고 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른 계획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관출장소 청사 계획의 특징은 시기별로 특정한 공통 계획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소규모 관립 시설의 신축에서도 나타나는 조선총독부 건축기구 설계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1937년에 계획된 삼박, 신천, 구읍, 부흥, 미타 세관출장소와 1938년에 계획된 후주고읍, 양평 세관출장소의 청사는 모두 동일한 계획을 바탕으로 신축이 진행되었다. [도판10]은 ‘세관출장소청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라는 제목으로 1937년 작성된 도면이다. 이 도면의 상단에는 수기로 ‘삼박 신천 구읍 부흥 미타 공통’이라 기재되어 있어, 이 도면으로 5개소의 청사를 동시에 신축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11]은 1938년 작성된 후주고읍세관출장소의 배치도이다. 이 배치도에도 역시 수기로 ‘미타와 공통’이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으며, 배치도에서 보이는 청사의 형태도 [도판10]과 동일하다. 이들 세관출장소의 형태는 다른 세관출장소와 달리 독특한 점이 있다. 전체 형태를 사각 형태로 계획하지 않고, 내부 공간의 용도에 따라 평면 형태를 들쑥날쑥하게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획 방식은 1934년의 창성 세관출장소 청사에서도 보이며, 이 계획이 시안이 되어 1937년, 1938년의 세관출장소 신축 당시 대규모로 적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도판12] 참조)
이렇게 하나의 계획으로 여러 시설을 신축하는 방식은 1930년대 종종 사용되었다. [도판13]은 1934년에 계획된 청사 설계도로 경원과 온성 세관출장소 청사 신축에 사용된 도면이며, [도판14]는 1939년에 계획된 청사 설계도로, 제목에서 하사지와 유선 세관출장소 청사에 동시에 적용되었음을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도판15] 역시 1939년에 계획된 청사 설계도로 고령진과 신아산 세관출장소 청사 계획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특히, [도판13]과 [도판15]는 내부의 일부 실배치만 다를 뿐, 평면의 형태나 공간 구성 수법, 입면 계획의 컨셉 등은 동일하여 5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계획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시설에 적용된 삼박 세관출장소 청사의 계획을 중심으로 청사의 계획적 특징을 살펴보면,([도판10] 참조) 전체 공간은 사무공간과 주거공간이 결합되어 구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법시설 중 지방법원출장소에서도 나타나는 구성 방식으로, 지방의 소규모 시설이라 관사를 별도로 짓는 것이 낭비였기 때문일 것이다. 두 공간은 현관을 별도로 가지도록 계획되었다. 전체 청사에서 가장 대형으로 계획된 것은 사무실(事務室)이었다. 사무실에는 일반인대기실(公衆溜)과 응접실 용도의 방, 변소 등이 같이 계획되었다. 주거공간은 6첩(帖)의 방 2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는데, 하나는 도코노마(床の間)를 갖는 다다미방으로 계획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온돌방으로 계획되었다. 다만, 대구와 평양 세관출장소 청사 에는 주거공간이 결합되어 있지 않고 사무공간만이 단독 건물로 계획되어 있다.([도판6], [도판7] 참조) 이는 이들 청사가 대도시에 계획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1917년에 계획된 회령세관출장소 청사에서도 주거공간은 확인되지 않는다.([도판5] 참조)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사무공간과 주거공간의 결합 계획이 1930년대 효율적인 건물 신축을 위해 등장하였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