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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세관지서 및 경성세관출장소, 남대문세관출장소

경성세관출장소는 인천, 부산 등 항구의 세관을 통해 수출입되는 상품들이 철도편을 통해 경성으로 들어오거나 경성에서 나가는 관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6년 서대문역 부근에서 관세국이 업무를 시작하였으나, 경성의 수이출품(輸移出品)의 대부분이 철도편을 이용하기 때문에 서대문역보다 남대문역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7년 8월 1일 남대문역 전면도로변에 ‘총세무사청 남대문출장소’를 개소한 것이 경성남대문출장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1월 1일에는 남대문출장소가 관세국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수출입품의 관리를 위해 1910년 3월 15일에는 인천세관 산하의 남대문출장소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인천세관 소속의 경성세관출장소로 다시 개칭되었다. 남대문역의 이용승객이 연이어 증가함에 따라 1921년 11월에는 경성세관출장소는 기존의 위치에서 남대문역 구내로 시설을 이전하고 새롭게 세관업무를 관할하였다. 1923년 4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54호에 의하여 인천세관 경성세관지서로 승격되었다. 세관지서로의 승격은 수출입 물량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라 기관의 업무와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세관’ 청사로 개편되어 운영되다가 1960년에철거되고 새로운 청사가 건립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경성세관지서에 관련된 26매의 도면이 소장되어 있는데, 남대문출장소 도면이 5매, 경성세관출장소 도면이 3매, 1921년 철도역 구내로 이전한 이후의 경성세관출장소 도면이 17매, 그리고 경성세관지서 도면 1매가 확인된다.

명칭 연도 도면수
인천세관 남대문출장소 1910.03 ~ 1910.09 5매
경성세관출장소(이축전) 1910.10 ~ 1921.10 3매
경성세관출장소(이축후) 1921.11 ~ 1923.03 17매
경성세관지서 1923.04 ~ 1945.08 1매

경성세관출장소가 남대문출장소라는 명칭으로 처음 건립되었을 때의 모습은 [도판1]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남대문역 전면 도로와 철로 사이의 삼각형 대지가 세관구역에 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로에 면한 출장소의 남쪽으로 연이어서 상가(上家, 임시건물)와 세관창고가 배치되어 있으며, 출장소 서쪽으로 창고를 추가로 신축하려는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신축 창고의 계획안을 살펴보면, ([도판2] 참조) 창고는 모르타르로 마감된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목조건물의 보안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목조 벽체 내부에는 대각선의 목재가 촘촘히 가로지르도록 계획하였다.

1921년에 경성세관출장소가 남대문역 구내에 새로 건립되는 배치 계획은 [도판3]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25년에 완공되는 경성역 뒤편의 철로 건너편 북서쪽에 조성된 출장소 부지에는 창고, 청사, 물치의 건물이 계획되어 있다. 청사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배치된 창고와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창고의 북쪽으로는 지금의 염천교에 해당하는 통과도로가 기재되어 있다. 새로운 출장소 부지와([도판3] 참조) 최초의 출장소 부지에([도판1] 참조) 나타난 청사의 평면을 보면 몸체가 동일한 십자형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기존 건물이 이축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청사재래평면도(廳舍在來平面圖, [도판4] 참조)와 청사이축평면도([도판5] 참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평면 계획안을 비교해 보면, 기존 1층 탕비실 후면의 변소가 건물 외부에 새롭게 계획되어 복도로 연결된 점 외에는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1921년 11월에 건립된 경성세관출장소는 기존의 청사를 옮겨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사 계획안을 좀 더 자세하게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청사는 2층의 목조건물로 1층에는 대사무실이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현관의 반대편으로는 감시힐소(監視詰所)와 탕비실 및 숙직실이 배치되었다. 2층에는 견본실과 식당겸응접실을 두고, 통계실, 서무계실, 소장실 등의 사무실이 계획되었다. 건물의 난방은 일제강점기 목조 건물의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3곳에 만들어진 벽돌조 연도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청사의 입면에서는 중세 유럽의 목조건물을 연상시키는 외관이 특징적이다. 목조부재가 외관 요소로서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였고, 높은 경사 지붕에는 여러 개의 채광창을 설치하고 그 위에 높은 첨탑을 두어 눈에 띄는 외관을 갖추었다. 청사의 첨탑과 지붕가구는 모두 목조트러스로 계획되었다.([도판6] 참조) 왕대공 트러스로 높은 경사지붕의 가구를 구성하고 X자형의 가새로 보강하였다. 첨탑은 지붕가구 위에 올라타도록 계획되었는데, 첨탑 지붕의 형상과 첨탑 지붕의 장식, 그리고 경사지붕의 용마루 장식은 일본 신사에서 보이는 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출입구는 전면과 좌측면에 2개소, 우측면에 1개소가 계획되었으며, 상부에 눈썹지붕 또는 박공지붕을 설치하였다.([도판7] 참조)

[참고도판]
  • 도판1. 인천세관남대문출장소철망혼응토창고신축기타공사설계도 기1/7, 1908-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2. 인천세관남대문출장소철망혼응토창고신축기타공사설계도 기3/9, 1908-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3. 경성세관출장소청사이축기타공사설계도/배치도/1, 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4. 경성세관출장소청사이축기타공사설계도/청사재래평면도/2, 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5. 경성세관출장소청사이축기타공사설계도/1, 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6. 경성세관출장소청사이축기타공사설계도/청사이축지부/4, 1921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7. 경성세관출장소청사이축기타공사설계도/청사이축지부/5, 1921년 추정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