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치안시설·전매시설

배치와 청사 계획

조선총독부는 1910년 강점 직후, 남산의 왜성대(矮星臺)에 있던 기존의 통감부 청사를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하지만 목조 청사의 불편과 부지의 협소함 등의 이유로 새로운 청사의 신축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1916년 6월 24일 경복궁(景福宮) 내의 부지에서 지진제(地鎭祭)를 거행하고 신청사를 착공하였다. 이 청사는 10여 년의 공사와 7백만 엔의 비용으로 1925년 12월 완공되었으며, 1926년 1월 4일의 시무(始務) 시에 왜성대에서 이사를 하여 업무를 개시하였고, 10월 1일 성대한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였다. 이로 인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흥례문(興禮門)과 그 회랑 그리고, 금천(禁川)과 영제교(永濟橋)는 철거되었다.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국에 지어진 몇 안 되는 양식(洋式)석조건축의 걸작으로 평가 받았으며, 10년의 세월동안 많은 재력을 소비하여 당대의 최고의 건축기술이 반영된 건축물이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청사는 미군정청 청사로 전용되었으며, 1948년부터는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활용되었으나,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내부는 완전 소실되었다. 1983년 시작된 내부 공사를 거쳐 1986년 6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가, 1993년 11월 철거가 확정 발표되었고, 1995년 8월 15일 첨탑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조선총독부 신청사 및 부속건물에 관한 도면은 모두 296매이며, 각 시설과 도면 수량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사(광화문) 관련 도면
명칭 연도 도면수
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 1926~1945 270
조선총독부 별관 1937~1945 26
도면 유형과 비율
도면유형 배치도 평면도 입면도 구조상세도 외입면상세도
도면 수 4 11 1 122 28
비율 1.48% 4.07% 0.37% 45.19% 10.37%
도면유형 내입면상세도 설비도면 비품도면 부속건물 기타
도면 수 28 37 1 36 2
비율 10.37% 13.7% 0.37% 13.33% 0.74%

덧붙여 신청사 계획에 대한 소장 도면 270매의 상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은데, 일반적인 계획도라 할 배치도·평면도·입면도 등은 거의 남지 않은 반면, 구조상세도(122매), 외부 및 내부 입면 상세도(56매) 등은 다수가 남아 있다. 특히, 구조상세도가 소장된 도면의 절반에 가까운 45%에 달하는 점은 이 도면들이 기본 계획이 완성된 이후, 실제의 신축을 준비하기 위해 작성된 실시 계획도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면이나 내부의 상세도, 각종의 설비도면이 다수 남은 것도 같은 정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도면에서 그동안 사진이나 관련 도서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신축 당시의 건축물 상세를 잘 살펴볼 수 있으며,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朝鮮總督府廳舍新營誌)』 등의 문헌을 통해 확인되는 공사 관련 일정은 다음과 같다.

신청사 계획에 대한 소장 도면
일시 내용 비고
1911 신축청사 예산 최초 요청 메이지 정부 불수용
1912 흥례문, 금천교 등 철거 조선물산공진회 준비
1912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독일) 고문 위촉 (기본 계획 위탁)
1914 게오르그 데 라란데 사망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郎) 위촉
1915 기본 계획 완성
1916.06.25 지진제(地鎭祭)
1916.07.10 기공식, 기초공사 착공 (오쿠라구미(大倉組))
1917.03.31 기초공사 준공
1917.06 철근콘크리트 골조공사 착공 (시미즈구미(清水組) 도급)
1918.11 청사 공사의 직영체제 전환 비용과다 및 공기 문제
1920.07.10 정초식(定礎式)
1923.05.17 상량식(上梁式)
1926.01.04 왜성대 청사로부터 이전
1926.10.01 낙성식(落成式)

조선총독부 청사는 5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크기는 전면 72간(間) 4푼(分)(약 131m), 측면 39(間) 6푼(分)(약 70m), 건평 2,219여 평, 연건평 9,471여 평에 달라는 근세부흥식(近世復興式) 즉,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건물의 평면은 두 개의 중정을 갖는 대칭 형태로 계획되었으며, 입면은 전체에 화강석을 두른 고전적인 외관으로 높이는 정면 중앙부의 경우 76척(尺) 7촌(寸)(약 23.3m), 첨탑 상부까지는 180척(약 54.7m)이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경복궁의 흥례문 권역에 계획되었다. 초기 계획과 관련된 배치도는 소장되어 있지 않지만, [도판1][도판2]에서 그 전체적인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도면은 모두 1926년 청사 완공 이후에 작성된 도면으로 추정된다. [도판1]의 경우 도면 북쪽에 기재된 경무대 총독관저의 평면과 신무문(神武門) 밖 관사 계획의 내용으로 볼 때, 1930년대 초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판2]는 청사 서쪽의 재료시험실 부분이 감시소(詰所)로 바뀌었음을 볼 때, 그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이 배치도에는 청사와 부속건물들의 명칭이 기재되어, 전체적인 당시의 사용 방식을 볼 수 있다. 근정전(勤政殿) 남쪽의 청사를 중심으로 좌우는 모두 기하학적인 정원으로 꾸며졌는데, 부속시설은 모두 청사 서쪽에 집중 배치되었다. 청사의 정 서쪽에는 감시소(詰所)와 소방원 감시소(消防員詰所)가, 그 북쪽으로 자동차고(自動車庫)가, 그리고 그 북쪽에 청사 전체의 난방을 담당하는 기관실(汽罐室)이 있었다. 기관실의 북쪽에는 창고·사진실·온실(溫室)이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 경회루 남쪽 담을 따라서, 영사실(映寫室)·목공장(木工場)이 배치되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청사 권역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경복궁의 북동쪽에도 창고 1동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활용도는 불분명한데, 창고에는 연필로 ‘조선미술전람회장(朝鮮美術展覽會場)’이라 기재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이후에 청사 서북쪽에 별관(別館)이 계획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였다.

앞서의 공사 일정에서 보듯이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기본계획 완성부터 완공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중간에 계획이 조금씩 바뀌었다. 기본 계획도가 거의 남지 않아 변경의 상세를 모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부 내용은 확인된다.

우선 전체적인 평면 계획은 [도판3]~[도판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도면들은 1922년 8월 작성된 도면으로 창호 및 문(建具)의 설치를 위해 작성된 도면들이다. 도면에는 평면도에 굵은 펜으로 각 입구와 창호의 크기를 표시하고 있다. 1922년 8월이면 상량식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시기로, 골조 공사가 거의 완공되는 시점에서 창호 및 문(建具)의 계획이 확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도면을 통해 전체 평면 계획의 대체를 살펴볼 수 있는데, 청사는 중앙과 좌우의 세 부분 및 전면 후면, 도합 5부분으로 크게 구성되었으며, 1층(一階)는 반지층으로 계획되어 실제의 출입구는 2층에 계획되었다. 1층에는 창고, 소사실 등의 지원실이 주로 배치되었는데, 중앙부 북쪽에는 대규모 취사장이 계획되었다. 실질적인 일층인 2층의 전면 중앙에는 화려한 현관과 이어지는 홀이 계획되었다. 전면 홀과 중앙 홀은 모두 상층까지 크게 열려 건물 전체의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홀의 뒤편에는 고등관식당이 계획되었다. 3층의 전면 중앙이 총독실로 계획되었는데, 총독실 좌우는 응접실과 비서실이 들어섰고, 그 서쪽에 정무총감실이 배치되었다. 3층 후면 중앙에는 화려한 회의실이 계획되었다. 4층에도 각종 총독부 사무실이 빽빽하게 계획되었는데, 후면 중앙부는 3층 회의실이 높은 층고로 계획되었고, 전면 중앙부 총독실의 상층은 회의실로 계획되었다. 5층은 지붕층으로 외벽에 패러핏(parapet)이 계획되었음을 볼 수 있고, 중정 쪽의 내부 복도들이 지붕으로 가려지지 않는 외부로 계획되어 있다. 전체 실은 모두 창고로 계획되어 있다. 한편, 이 도면들의 분류표에는 ‘村井(촌정)’이라는 작성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사람은 당시 고원(雇員) 즉 고용직이었던 ‘이와이 겐키치(村井健吉)’로 보이는데, 각 도면들은 그의 작업 내용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전술한 1922년의 계획 도면과 [도판8][도판9]를 비교해 보면, 일부 변화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두 도면은 각각 한 장에 2, 3층과 4, 5층의 평면이 그려져 있는 도면으로, 1923~24년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화의 내용을 아래층부터 살펴보면, 우선 좌우의 남북방향 건물의 중정 쪽 돌출부에 있던 2기씩의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그 부분이 일반실로 변경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로서 처음에 모두 승강용 12기, 화물용 1기가 계획되었던 것이 승강용 8기 화물용 1기로 축소된 것이다. 이에 더해 3층과 4층의 경우 이에 더해 전면 양쪽의 모서리실의 출입문이 복도 쪽으로 돌출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2층의 경우에는 그대로인 것과 비교해 보면, 변경의 장점이 무엇인지 뚜렷하지는 않다. 가장 많은 계획적 변경이 보이는 부분은 5층이다. 우선 창고의 대부분이 사무실로 변경되었다. 엘리베이터도 5층까지 연장되었으며, 원래 5층에 계획되었던 창고 면적이 축소됨에 따라 외부에 부속 건물로 창고를 짓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무실의 증설은 공사가 오래 진행될 동안 총독부의 기구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으로, 이주 시점에 고등관 103명, 판임고원(判任雇員) 1,057명, 급사(給仕) 101명, 임시용인(傭人) 42명, 기타 사환(小使)을 합쳐 1,500여 명이 이 건물 안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덧붙여, 1층 부분 계획 변화의 내용은 [도판10]에서 확인된다. 이 도면은 1933년에 제작된 청사진으로 신축이 끝난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도판3]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계획적 변화를 볼 수 있다. 우선, 전술한 측면 복도의 엘리베이터가 없어짐에 따라 1층에서도 해당 부분이 일반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서북쪽 중정 쪽 부분이 확장되어 변전실이 추가로 계획되었으며, 각 실들의 내부 칸막이들에도 상당한 조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 회계과 사무실 하나가 1층에 추가로 계획된 점, 예비실 대부분이 창고로 전용된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입면도의 경우에는 현재 단 1장만이 있다. 청사의 좌측면도로 내용이 소략하며 트레이싱지에 연필로 작도된 것을 보아, 완성도면 이전에 내부용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입면의 전체적인 형태는 기재되었으나, 각 부분의 상세는 모두 누락되었다. 전체적인 외관을 살펴보면, 반지층부는 전체 건물의 육중함을 받치게 좌우로 긴 띠장식이 적용되었으며, 각 모서리의 타워들은 고전 양식의 기둥 및 주두의 형태를 차용하여 화려하게 계획되었다.

[참고도판]

  • 도판1. 조선총독부부지, 1930년대 초반 추정 상세보기
  • 도판2. 조선총독부(경복궁)부지평면도, 1930년대 초중반 추정 상세보기
  • 도판3. 건구공사 / 1 / 조선총독부청사 / 입구급창 / 설계도 / 지계 / 601, 1922 상세보기
  • 도판4. 건구공사 / 2 / 조선총독부청사 / 입구급창 / 설계도 / 일계 / 599, 1922 상세보기
  • 도판5. 건구공사 / 3 / 조선총독부청사 / 입구급창 / 설계도 / 이계 / 598, 1922 상세보기
  • 도판6. 건구공사 / 4 / 조선총독부청사 / 입구급창 / 설계도 / 사계 / 597, 1922 상세보기
  • 도판7. 건구공사 / 5 / 조선총독부청사 / 입구급창 / 설계도 / 600, 1922 상세보기
  • 도판8. 총독부청사평면도 / 2계 3계, 1923~24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9. 총독부청사평면도 / 4계 5계, 1923~24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10. 총독부청사평면도 / 일계평면도 / 외번1호, 1933 상세보기
  • 도판11. 조선총독부신청사설계도 / 좌측면도, 1915~25년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