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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부속기관·관측소

관측소시설 계획의 일반적인 특징

일제강점기 관측소에서는 다양한 기상관측이 하루 여러 차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상관측은 매시 관측하는 기압, 기온, 습도, 풍향 및 풍속 등 5개 요소와 1일 7회 관측하는 일 평균기온 차, 수증기장력, 풍향별 평균풍속, 풍향 관측회수, 강수량, 강수일수, 증발량, 운량, 일조시수, 일기일수, 지면온도, 지중온도, 최저지온 등의 요소를 정기적으로 관측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관측소 계획에 있어서는 다양한 기상 정보를 계측할 수 있는 장치가 설치된 관측실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관측실을 중심으로 일반사무를 위한 공간과 야간 관측자가 숙식을 하며 관측할 수 있는 숙직 공간이 함께 계획되었다.

관측소 시설의 일반적인 배치는 [도판1]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판1]은 1939년경에 제작된 강릉측후소의 배치도이다.

  • 도판1. 강릉측후소청사신축기타공사배치도 / 1, 1939-40년 추정 상세보기

장방형의 부지에 청사건물과 부속가(附屬家) 창고, 노장(露場)이 배치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 중 관측소시설의 핵심인 청사는 기상관측을 위한 각종 관측실과 일반사무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속가에는 숙식 및 편의시설이 배치되었다. 노장은 건물 외부에 설치된 별도의 관측장이었다.

청사건물과 부속가는 웅기측후소([도판2] 참조)나 평양측후소([도판3] 참조)에서처럼 대부분의 관측소시설에서 하나의 건물로 계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시설에 따라 [도판4]의 혜산측후소처럼 복도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청사와 부속가의 건축 계획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1915년경에 계획된 웅기측후소의 경우에는 청사와 부속가가 구분되지 않고 한 공간 내에 사무영역과 숙직영역이 혼재되어 있었다. 반면, 1920년경에 계획된 평양측후소의 경우에는 사무영역과 숙직영역이 청사와 부속가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이 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1944년경의 혜산측후소의 경우에는 청사와 부속가 영역이 구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을 분리하여 복도로 연결하도록 계획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관측소 청사 공간을 용도별로 구분하여 계획하여 사용하는데 보다 유리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사무영역은 후대로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점차 관측해야 하는 기상정보가 증가함에 따라 관련 관측실과 설비가 더욱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측 및 사무공간의 증가는 숙직공간과의 공간적 분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30-40년대에도 여전히 평양측후소 청사처럼 분리된 관측 및 사무공간과 숙직공간이 한 건물 내에 있는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이는 당시 전쟁으로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최소한의 기능적인 요구에 기초한 계획안으로써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도판2. 웅기측후소청사기타신축설계도 / 1, 1915년경 추정 상세보기
  • 도판3. 평양측후소청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 / 청사급부속가지부, 1910년대 후반-1925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4. 조선총독부혜산측후소신축공사설계도, 1944-45년 추정 상세보기

관측소 청사의 구체적인 평면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도판3] 참조) 청사는 관측관련 사무를 볼 수 있는 사무실, 소장실(所長室), 도서실 등의 사무공간과, 기상관측을 할 수 있는 관측실, 지진계실, 청우계실(晴雨計室), 기계실, 암실(暗室) 등의 각종 관측실이 있는 관측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또, 청사건물의 일부분은 2층으로 계획하여 옥상에 바람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대를 설치하였다. 여기에서는 풍력과 풍향, 풍압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가 설치되었으며, 그 계측은 1층의 관측실에서 이루어졌다. 지진계실은 별도의 준비실을 가지고 있으며, 기압을 측정하는 청우계실과 기계실, 암실 등은 각각 독립된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부속가는 취사실, 욕실, 변소, 숙직실, 소사실 등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도판3] 참조) 대부분의 경우 취사실을 중심으로 다른 공간을 둘러 배치하였고, 소사실과 숙직실의 경우는 온돌 또는 다다미로 바닥을 마감하였다.

청사 계획에 사용된 구법 역시 시기별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양식목조에서 벽돌조를 거쳐 벽돌과 철근콘크리트의 병용구조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표> 참조) 일반적으로 청사의 관측공간 부분에는 목조 또는 벽돌조를 사용하였고, 관측대를 설치하는 청사의 2층 부분은 대부분 벽돌과 철근콘크리트 병용구조를 적용하였다.([도판5] 참조) 또한 지진계실이나 가스실(瓦斯室) 등에도 그 공간적 특성상 벽돌조로 계획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도판5. 여수측후소청사신축기타공사설계도, 1942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6. 세포측후소신축공사 / 평면자도각복도건구표 / 2, 1942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7. 조선총독부관측소신막지소청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 / 평면급건도 / 12, 1937 상세보기
<표> 관측소 및 측후소의 청사의 건축계획
명칭 설치년도 도면 작성년도 평면 구조 층수 마감 기타특징
조선총독부관측소 1910 1918-20년 추정 양식목조 2층 영국식비늘판벽 증축원형관측실
웅기측후소 1914 1915년 추정 일식목조 1층 영국식비늘판벽 증축관측실
제주측후소 1326 1923년 추정 벽돌조/일부 철근콘크리트조 병용 부분2층 벽돌 원형관측실
평양측후소 1910 1910년대 후반-1925년 추정 ㅡ/중복도 벽돌과 철근콘크리트의 병용구조 부분2층 모르타르 공통도면 -강릉
강릉측후소 1911 1939-40년 추정 ㅡ/중복도 벽돌조/일부 철근콘크리트조 병용 부분2층 모르타르 공통도면 -평양
청진측후소 1939 1939-41년 추정 ㅡ/중복도 벽돌과 철근콘크리트의 병용구조 부분2층 모르타르 평지붕
세포측후소 1942 1942년 추정 일식목조/일부 벽돌, 철근콘크리트 병용 구조 부분2층 모르타르
여수측후소 1942 1942년 추정 ㅡ/중복도 벽돌과 철근콘크리트의 병용구조 부분2층 모르타르 현관장식
혜산측후소 1944 1944-45년 추정 ㅡ/중복도 일식목조 1층 모르타르 목조옥상관측장

관측소의 입면계획 역시 시기별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표> 참조) 일제강점 초기의 계획안에서는 영국식비늘판벽 등의 나무판재로 마감한 사례가 확인된다.([도판2] 참조) 이렇게 판벽으로 외벽을 마감하는 방식은 점차 방한(防寒)의 이유로 1910년 중반 이후부터는 모르타르 마감으로 바뀌게 되었다. 벽돌조 청사의 경우에는 벽돌을 그대로 노출시키거나 모르타르로 마감하는 방식이 함께 사용되었다.([도판6] 참조)

  • 도판8, 여수측후소청사신축기타공사배치도, 1942년 추정 상세보기

노장(露場)은 기상관측을 위해 외부에 설치된 관측장으로 별도의 울타리를 사용하여 독립공간으로 설치되었다.([도판8] 참조) 또한, 노장 안에는 우량계실(雨量計室)이 지하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 관측소 시설에는 상층 및 고층기상관측에 사용되던 수소가스격납고(水素瓦斯格納庫), 수소가스충전가(水素瓦斯充塡家), 관측가(觀測家) 등의 설비가 계획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스를 다루는 공간이기 때문에 안전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별도의 건물로 계획하였고, 가스저장을 하던 격납고의 경우에는 벽돌조로 계획되었다. 고층기상관측가의 경우는 전자기파가 관측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건물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었으며, 모든 건축재료는 철물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을 사용하였다([도판9] 참조)

  • 도판9. 제주측후소고층기상관측소기타신축공사설계도 / 배치도급판임관사 / 물치급물간 / 1, 1939-45년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