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S INDUSTRIAL SECTOR

아시아의 동쪽에 자리한 한국, 오랜 역사를 가지면서도 후진국으로 뒤떨어진 한국에 1960년대를 기해서 공업입국으로 근대화의 터전이 잡히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실시한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 때문인 것이다.



이 경제개발계획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24시간 송전의 대량공급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0년 초에 고작 37만 킬로와트이던 것이 지금은 그 10배가 넘는 380만 킬로와트에 달해서 무제한 송전을 할 수 있게 됐으며 80년대 초에는 천만 킬로와트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 나라의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려면 공업생산의 원료를 생산하는 공업, 다시 말해서 중공업이 발전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원래가 경공업지대여서 1960년의 호송비율은 중공업 20%에 경공업 80%라는 분포를 나타내고 있었다.



무기화학 분문에서 시멘트공업은 66년도에는 188만 톤밖에 생산하지 못하던 것이 이제 와서는 800만 톤에 달하고 있다. 오는 80년대 초에 가서는 지금의 곱절인 1,600만 톤으로 늘어난다. 그래서 외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철강제의 수요는 그 나라의 국력에 비례한다고 했다. 1972년 4월에 10월 유신을 단행한 한국은 이제 중화학공업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공업화란 철강제를 많이 쓰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중요한 공산품도 철이 대부분이요, 그 공산품을 생산하는 기계도 또한 철이고 보면 제철능력은 곧 공업화의 척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960년 한국의 철강생산은 고작 11만 톤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103만 톤 규모의 공장 22개가 포항제철에 속속 준공됐다. 앞으로 제2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대단위 기계종합공업단지도 건설함으로써 80년대 초에는 천만 톤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싼값으로 수송을 담당해주는 철도, 그 철도를 달리는 기차의 대량생산에서도 공업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알루미늄의 생산량도 급격히 늘어났다. 한국의 공업도시 울산에 알루미늄 공장이 들어섬으로 해서 지난 7~8년 동안에 네 곱절의 생산증가를 보여 연간 1,500만 톤의 제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조선공업 역사는 오래지 않다. 지난 60년대 초반만 해도 겨우 목선 건조나 선박수리에 매달린 형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에는 1,500만 불 어치를 수출하기까지 됐는데 오는 1980년에는 10억 불어치의 선박을 수출해서 당당 세계 10대 조선국가로 등장할 우리의 나래를 펴고 있다.



육로수송의 총아 자동차의 경우 그 생산규모는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처음에는 외국과 기술제휴로 시작됐던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중소기업의 발달로 자동차부품의 거의 전부를 국내 생산으로 충당하게 됐으며 80년대 초에는 연간 50만 대로 증산될 것이다. 자동차 그 자체뿐만 아니라 타이어를 비롯한 각종 부품의 생산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도로의 포장으로 해서 자전거의 수요가 늘어나자 여기에 따라서 그 생산량도 증가를 거듭해 왔는데 10년 만에 열 곱절이나 늘어난 연간 30만 대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는 또 오토바이 생산 공장, 소득이 올라가고 경제가 안정되자 여가를 즐기는 주민들의 수도 늘어나게 됐고 레저용으로 오토바이의 생산이 격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사실 196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의 자동차 공업이 있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자동차산업을 유치했고 1969년에는 3만 7천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버스조차 타기 어려웠던 지난날을 생각할 때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정녕 희망찬 그것이 아닐 수 없다.



공업의 급진적인 발달은 농업의 기계화를 촉진했다. 물론 농업기계화는 아직 출발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전망은 매우 밝다. 지난 1965년에 고작 1,100대에 지나지 않던 경운기가 5년 만에 9천 대로 늘어났고 지금은 1만 대를 헤아리게 됐다. 이 밖에 방제기구, 양수기, 원동기 등도 공장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 같은 농업기계화의 움직임은 바로 공업발전의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농업을 위주로 했던 한국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비료의 91%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서 비료공장의 건설을 서둘러 불과 3년 만에 자급할 수 있게 됐고 10년 만에 15배의 생산능력을 갖게 됐다. 이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세월이 온 것이다. 비료수급은 이제 국내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아 해외수출의 여유를 보여 농업과 함께 발전하는 공업한국의 오늘을 볼 수 있다.



한국공업에서 가장 미약한 부문이 기계공업이었다. 일 년에 3억 불이나 남의 나라 기계류를 사들여 와야 했던 지난날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지난해 1972년에 오천만 불어치의 기계류 수출실적을 올리게 됐다. 이 가운데는 수송용기계가 가장 많고 일반기계, 산업기계, 전기기계 순으로 팔려나갔다. 오는 1980년에 가서는 이런 기계류만 가지고도 16억 8천만 불의 수출실적을 올리려 한다. 엄청난 수출목표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 총 수출액이 18억 달러이고 보면 여기에 맞먹는 액수를 기계류만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한국 기계공업의 찬란한 미래상이 아닐 수 없다.



17억 달러에 이르는 그날의 기계류 수출을 위해서는 해마다 55%의 수출증가율을 이룩해야 한다. 수출신장의 상징적인 품목을 생산해 내는 전자공업은 또 어떠한가? 냉장고, 텔레비전 등 전자공업의 괄목할만한 발전으로 해서 지난해 72년에는 1억 5천만 불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오는 1980년에는 25억 불의 실적을 올려서 전체 100억 불 목표의 1/4를 차지하게 된다.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그것도 가장 부진했던 기계공업분야에서 이것은 물론 중공업발전계획에 발을 맞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지칠 줄 모르는 공업입국의 계획과 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 중소기업을 위한 단지조성계획이 전국적인 규모에서 실현되고 있고 외부 경제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개발이 가능한 지역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대단위 전자부품단지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그 전망은 한결 밝다.



화학공업의 발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기적을 이루었다. 특히 석유를 위시해서 합성수지, 유지, 고무, 피혁, 제지 등 유기화학공업에 있어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는데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하루 원유 처리능력 3만 5천 배럴의 울산정유공장이 세워져서 석유제품을 국내에서 처음 생산, 공급하게 됐다. 석유화학 원료가 되는 에피넨 생산이 지금은 10만 톤에 이르는데 1980년대 초에 가면 그 8곱절이 늘어나서 80만 톤의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수천 년 동안 하늘을 쳐다보며 농사에만 의존해 오던 한국 그러나 이제는 농공병진의 우렁찬 대행진으로 의욕에 차 있다. 무엇이든지 만들어낸다. 플라스틱도 만들어내고 비닐도 만들어낸다.



역시 무기화학공업부문으로 판유리 공업도 왕성하다. 무기화학공업 가운데에서도 이런 판유리와 같은 내화벌 공업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와서 국내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아 해외수출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계류 수출에 박차를 가하게 될 광업기계류, 현미경, 렌즈, 카메라, 망원경 같은 광업기계류는 앞으로 공장시설이 더욱 늘어나서 더 많은 생산을 낼 것이고 한국의 공산품 가운데 주요 품목으로 수출실적을 높일 전망이다.



판유리와 같은 계열인 도자기공업도 벅찬 기대 속에 나란히 발전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섬세한 여인네의 손끝으로 다듬어지는 조화는 또 얼마나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가. 가발도 마찬가지 외화획득의 인기품목이다. 잔손이 많이 가는 가발은 인력이 풍부한 한국에서는 안성맞춤이며 손재주가 있는 한국 여성이 정성껏 만들어내는 한국 가발은 구미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빼어난 문화유산이 이를 말해주듯이 우리의 뛰어난 손재주는 이 같은 어린이용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그 솜씨를 크게 자랑할 만하다. 기계화로 대량생산하는 완구공업 그 우수한 품질로 해서 해외시장에서 큰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



피혁공업 역시 대단하다. 생활의 윤택을 점칠 수 있는 이런 신발류의 발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지난 1965년부터 7년 동안 한국에서 맞춤 구두의 증가량이 7곱절로 기록됐는데 지금은 국내수요에만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점으로 보아 다른 공업에 뒤질 것이 없다.



해마다 20%에 가까운 공업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한국의 공업, 이에 따라 국민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따라서 식품공업분야도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수출수요의 증대로 제지와 목제품 종류는 1965년을 기준으로 7곱절이 늘어났다. 수출품목 중 가장 두드러진 합판생산의 경우 1960년에 1억 8천7백만 평방피트이던 것이 10년 만에 16배가 늘어난 2억 8천4백만 톤이 됐고 수출상품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원목의 도입이 순조로워서 제지공업 또한 눈부신 발전을 되풀이해왔다.



중화학공업의 시대로 들어선 한국의 공업이지만 아직 섬유공업의 전망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6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섬유류 수출은 그동안 연평균 40%의 높은 신장률을 이루어 왔다. 100억 불 수출이 이루어질 1980년도의 섬유류 수출목표는 자그마치 27억 불, 그러기 위해서 시설의 보다 대담한 확장을 서두르고 있다. 이 거창한 목표를 위해서 의류와 메리야스 제품, 스웨터, 면제품, 모 제품, 홀치류 제품, 견?편직물 등 각종 분야에서 차곡차곡 생산량을 늘려가고 있다.



한국의 공업,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공업의 발전은 개발도상국가의 모범케이스가 됐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농수산품이 수출품의 대부분이던 것이 1960년대에 들어서 공산품으로 바뀌고 수출은 1960년도에 5천만 불이, 10년 후인 1972년에는 18억 불을 돌파했고 또 10년 후인 80년 초에는 100억 불 수출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달성에 모든 승부를 걸고 약진의 모터 소리를 우렁차게 울리고 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천 불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근면, 자조, 협동으로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