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새해 첫 소식으로 대한뉴스는 이승만 대통령의 활동의 방문을 보도했다. 지난해 6월 이미 자유당 정 부통령 후보로 추대된 이승만 박사는 새해 초부터 빠른 행보를 내딛고 있었다.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이 무렵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부통령 선거일이 3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대통령 후보 조병욱이 신병출장 미국에 가 있다는 이유로 민주당은 조기 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농번기를 피한다는 이유로 조기선거를 결정한 것이다. 자유당의 유세는 이화수가 이끄는 반공연예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이승만 후보는 열차를 이용해 전국 순회유세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 민주당측에 타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욱이 미국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것이다. 투표일을 한 달 앞둔 때였다. 고인이 되어 돌아온 조병욱박사의 장례식은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56년 신익희 후보에 이어 두 번째로 선거를 앞두고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가 사망하자 국민들은 대중가요의 유정 천리의 가사를 바꾸어 애도 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네. 선거에 대한 관심은 부통령 후보에 쏠렸다. 나이가 많은 이승만 대통령의 유보 시 그 자리를 대행할 부통령이었다. 이때부터 자유당은 부통령자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자유당은 야당의 유세를 각각의 수단으로 방해했다. 민주당의 선거유세가 있는 날은 일요일에도 학생을 강제로 등교시켰다. 이로서 최초의 강제 등교에 대한 저항은 대구에서 퍼져 나왔다. 3월 15일 부정선거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 유명한 3.15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날 투표장은 4전4할투표 짝을 지어 투표장으로 보내는 3인조 5인조투표와 대리투표 투표 시작 전 미리 준비된 기권표를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해 집어넣는 샌드위치 표 기권표 조작에 항의하는 유권자들을 협박하는 왕장부대 등 상상을 초월한 온갖 부정들이 이때 등장했다. 오전 10시 30분 마산의 민주당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했고 마산시민들은 즉시 부정선거 항의에 들어갔다. 이날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개표결과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의 압승이었다. 대통령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은 78%나 되었다.

제 5대부통령에 당선된 민의원 의장 이기붕씨는 내외 기자들과 회견하고 국민들의 지지에 감사한 국민들을 위한 민심수습에 힘쓰고 선거공약을 실현하는 등 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조정쇄신에 모든 힘을 바치겠다는데 주로 당선소감을 피력했습니다.

대통력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송수 서화전을 시작으로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정선거 득표 시위도 수그러져 있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진 당선이었지만 자유당의 완전한 승리처럼 보였다 .3월21일에는 이대통력의 84회 생일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이무렵 아들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의 중앙부대에 버려진 사실을 모르는 김주열의 어머니는 한 달 동안 마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실종된 지 근 한 달 만인 4월11일에 발견된 김주열의 참혹한 모습에 그 어머니는 경악했다. 경찰은 김주열의 시신을 급히 마산 도립병원 영안실로 옮겼다. 그러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산전체에 퍼져나갔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찾아오는 시민 학생의 인파를 경찰의 힘으로는 이미 저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나오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를 못했다. 아들을 찾아 헤매던 김주열의 어머니를 보았던 마신 시민과 학생들은 점차 군중을 이루었다. 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로 생각했다. 부모들은 또 자기 자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산의 제 2차 시위는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12일부터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신문기자 국회조사단 대한변호사 협회 등 각계 진상규명 노력으로 경찰이 끝까지 은폐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현장조사는 최루탄 발사와 총격에 이어 사체에 이르기까지 서슴지 않았던 자유당 정권의 비도덕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대답은 마산사건의 배후에 공산당의 개입협의가 있으니 난동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에 한을 남긴 채 김주열의 시신은 비밀 호송되어 고향땅인 마산에 묻힌다. “절대 여기 안 묻을 거라고 서울 이기붕한테 가져가라고 악을 썼습니다. 문중사람들이 말려서 억지로 여기로 묻었지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돌아가던 고대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무차별 폭행당한다. 다음날 조간신문을 통해 이 사건이 보도되고 이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월 19일 그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다. 낮 12시 30분 시위대는 경무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후문에 1차 저지선을 형성한 경찰은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오후부터 출근했던 직장인들과 연대에서 환호를 보내던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경무대는 시위대 최종목표이자 경찰에게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청주 광주 제주 등 각 지방의 시위 상황도 비슷했다. 오후 1시경 경무대를 향하던 선두학생들이저지선으로 세워둔 소방차를 빼앗았다. 경무대를 향한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오후 1시30분경이었다. 이때 부산 광주 등 지방에서도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무대 앞에서 지방청에서 을지로와 태평로에서도 총 맞은 시민 학생들이 계속 쓰러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 180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서울을 비롯한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4월 21일 전 국무의원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이어서 이기붕이 사표를 고려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부상자를 방문하는 등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시위는 가라앉는 듯 했다. 4월 25일 300여명의 대학 교수들이 대통령 하야요구를 글자로 한 수국시책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랫카드를 앞세운 교수단의 시위는 부정선거 규탄에 다시 불을 붙였다. 4월 26일 새벽부터 쏟아져 나온 시위는 대통령하야로 바뀌고 있었다.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외치며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쏟아져 나왔다.

오전 10시경 대통령과 면담을 마친 시민대표가 대통령이 하야를 고려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Err_Code(18:25) 문화시민 여러분 우리는 현재 늦은 감이 있으나 민주주의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구민대표 되시는 분은 내려주시고 시음방송을 하시는 분은 일어나 가지고 제각기, 제각기 해산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오후 2시 국회에서는 뒤 늦게 이 대통령의 즉시 하야를 결의하고 다음날인 27일 이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첫째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요. 둘째는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이기붕의 장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

28일 이기붕 일가는 자살했다. 장래식장에 참석한 것이 대중 앞에 나선 이승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난 1948년 수립된 제1공화국은 12년 만에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막을 내렸다. 거리는 질서를 찾았다. 대학생들은 장기간의 데모로 흐트러진 거리 질서를 바로 잡는 한편 치안유지에 나섰다. 4.19부상자와 사망자 유가족을 돕기 위한 구호함에는 시민학생들의 온정이 끊이질 않았다. 이해 4월은 국민의 힘으로 민권이 수립된 날이었다. 그 변혁은 수많은 젊은 학생과 시민들의 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허정 과도 정부가 출범했다. “강압과 폭력으로 만들어진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불법적인 일제행위를 막는 혁명적 정치개혁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단행할 것이다.” 지난해 폐간 조치되었던 경향신문도 복간되었다. 피로서 얻어진 정치적 자유 그것은 부당한 정부를 향해서는 국민이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준 최대 사건이었다.

“먼저 가신 영령들이여 거룩한 이름이여 당신들은 새로운 새벽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전부 바치었나이다.”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이 국제본 회의에서 통과 되었다.

지난 12년 동안에 걸쳐 독재정권을 뒷받침한 대통령중심제는 이렇듯 물러가고 다만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그날부터 51일 만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갈망하던 내각제로 개편안은 드디어 통과되었다. 제 2공화국의 깃털이 꿋꿋하게 마련되었으며



나흘 후 미국의 현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과거 독재 정권에 대한 청산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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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제헌절에는 창건 이래 처음으로 3군 참모총장의 헌법 준수 선서식이 있었다. 국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의한 7.27총선거 결과 국회가 개헌되었다. 제 2공화국 초대대통령에는 민주당의 윤보선이 당선되었다.“나는 오늘 용서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선포가 끝난 다음 백 참의원 의장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윤대통령에게 대통령께 전하는 무궁화 대 훈장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서 4월 혁명으로서 얻은 정치적 자유에 이어서 앞으로는 경제적 자유를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습니다. 국무총리에는 장면이 국회인증을 받았다. “미국의 원조라는 것이 사실 언제까지 있는 것인지 무한하다고 생각될 리는 만무하고 또 그렇게 기대해도 우리가 안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미국의 원조가 있는 동안에 가장 적절하게 우리가 잘 쓰고 또는 앞으로 점점 줄어 들어갈 것을 예상을 하고 나중에는 또 이것이 완전히 끊어질 것을 예상하고 달리 또 우리가 경제 자립의 기회를 찾아내야겠다. 8월 19일에는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고 10월 10일에는 4.19혁명의 동화상을 제공했던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소파상을 받았다. 그러나 부정선거 원흉과 4.19발포사건 등 관련자 48명에 대한 공판은 준엄한 단죄가 내려질 것이라는 당시의 예상을 크게 뒤엎은 것이다. 사형이 구형된 9명 가운데 실제 사형이 선고가 내려진 것은 시경 국장 한명 뿐이었다. 재판부는 당시의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최선을 다한 판결이라고 해명을 했다. 마침내 4.19희생자들과 부상자들은 특별법을 만들어 이들을 처벌하라는 시위에 들어갔다. 이해 12월에는 서울시와 각도 의회의원선거를 필두로 시장 도지사 각 읍면 장까지를 직접 손을 뽑는 네 차례의 지자제 선거를 치러냈다. 민주제도 실현을 위한 갖가지 진통을 겪고 있을 이 무렵 마산에서는 신문 배달부위안 체육대회가 열렸다. 4.19의거 때 전령사 역할을 했던 신문배달 소년들을 위한 행사였다. 이날 마라톤에서 우승한 학생에게는 어린 호랑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960년 그해 12월 30일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