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2차 대전은 끝났다.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연합군 대표는 미 항공모함 미조리 호에서 패전국 일본을 대표한 시게미스 외상으로부터 정식항복문서를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는 해방의 감격이 넘쳐흘렀다. 겨레의 함성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36년간의 압제에서 해방된 기쁨의 함성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8월 22일 이북에는 치스차코프 대장이 이끈 소련군이 먼저 평양에 진주했다. 9월 2일 맥아더 사령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은 미군, 북은 소련군이 점령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마의 38선은 그어져 조국은 분단되고 말았다. 서울에는 9월 9일 미군이 진주, 38선 이남 지역에 전후 처리를 맡았다. 뒤이어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준장은 조선총독 아베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중앙청에 게양됐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해외에 망명했던 애국지사와 동포들은 속속 귀국했다. 이승만 박사는 10월 16일에 미국에서 돌아왔다. 김구 선생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도 11월 23일에 돌아왔다. 해방 이듬해 첫 3.1절 기념식, 이날 소위 민주진영은 파고다공원에서 공산계열은 남산공원에서 각각 행사를 열었다. 서울시민들은 남북으로 갈라놓은 38선을 없애자는 데모를 했다.



1946년 3월 20일 한반도의 전후처리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는 우리나라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 문제를 다뤘지만 결국 결렬되고 스티코프 소련대표도 이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처음에는 우익진영과 함께 다 같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분자들이 며칠 후에 이북의 지령을 받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서울에는 공산분자들이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고 위조지폐를 찍어낸 정판사 사건, 10.1 대구 폭동 등 남한을 적화시키려고 온갖 책동을 다 쓰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정국 하에 국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벅찼다. 지리적으로 남한은 농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남한은 비료공장 하나 없었다. 그저 약간의 경공업이 있었을 뿐이었고 전력마저 북쪽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나마 북한은 1948년 5월 송전을 중단하고 산업시설을 마비시켰다.



1948년 1월 유엔 총회의 결의로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왔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관은 이들이 북한 땅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다. 유엔은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 땅에서만 선거를 실시, 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이때 김구 선생은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을 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5.10 민주선거, 남한에서만 198명의 국회의원을 뽑고 인구 비례에 따라 북한에 대한 1/3의 의석은 남겨 놓았다. 5월 31일 개원된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어졌고 그해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정부수립 3개월 만에 여수에서는 공산집단 40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폭동의 추세를 인근 순천까지 넓혀갔다. 이것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인데 공산 폭동은 제주도와 지리산에서도 잇따라 일어났다.



정부수립과 때를 같이해서 국군의 발족도 봤다. 1948년 9월 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해안경비대를 해군으로 개편하고 뒤이어 해병대, 공군의 발족으로 비록 장비는 빈약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됐다.



한편, 북한은 어떠했는가? 해방 직후 평양에는 소련군 첩보원이었던 30대의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빌려 군중 앞에 나타났다.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8월 25일 흑색선거를 통해서 내각 수상이 됐고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이북에는 과거 일본이 대륙침공을 위해 세운 전략적인 산업시설이 있었다. 수풍댐 발전량은 당시 한반도 전체 전력의 92%를 차지했다. 이런 산업시설의 복구에 북괴의 공산당은 일정 때보다도 더 가혹하게 주민들을 강제 동원했다. 6.25 당시 북괴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김책이 강제 노동장의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이다.



북괴의 남침 준비현장을 추적해본다.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고 이듬해 정월 특별 군사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8개월 내에 북괴군의 전쟁수행 능력을 양성할 사명을 띠고 온 것이다. 공산당 특유의 조직과 강제력을 동원한 김일성의 남침 준비는 치밀했다. 김일성은 중공과도 상호 방위조약을 맺어 남침에 대비한 공동 전선을 구축해 놓았다. 특히 김일성은 만주에서 오랜 전투경험을 쌓은 중공군 소속 팔로군 등 2만 명의 한인계 병력을 북한으로 데려왔는데 이들이 남침의 주력부대로 편성됐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가서 겉으로는 조소경제문화협정이라는 것을 맺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주 내용으로 한 군사비밀협정을 맺었다. 스탈린의 서명이다. 소련제 탱크가 북한으로 반입됐다. 남침의 주력이었던 T-34형 탱크 242대가 속속 전선에 배치됐다.



농촌 이동연예대, 남녀 청소년들의 군대 입대를 선동하는 현장이다. 북괴는 그동안 지원형식 모병을 강제모병으로 바꾸고 18~30세까지 인민군으로 끌어갔다. 군수공장도 땅 밑으로 들어갔다. 당시 북한에는 우리나라 폭탄 매장량의 70%, 비료공장, 제련소 등 금속공업생산이 83%, 광업자원 70%라는 산업자원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괴는 남한에서는 생각도 못한 박격포, 따발총, 탄환을 이렇게 생산해 내고 있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괴의 남침 준비는 완료됐다. 1950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작년에 우리는 조국통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반드시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다짐한다고 말했다. 북괴는 야크기 200여 대도 소련에서 받았다.



평온한 서울 거리 그러나 이 평온 속에 북괴의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몰랐었다. 북괴는 북에서는 남침준비를 하면서 서울에서는 공산당 지하조직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교란을 획책하고 있었다. 한때 공산당은 국회에도 침투, 주한 외국군의 철수를 종용하는 결의문을 내는가 하면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도 일으켰다.



6.25 동란 전해인 1949년 6월 29일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모두 철수해 버렸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에치슨은 6.25가 발발하던 해 1월 미국의 극동방위선 문제를 이렇게 발표했다. 즉 이 지도에서처럼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내에 한국과 대만은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긴박한 정세 속에 우리 국방력은 어떠했는가? 여기 서해안을 낀 38선 인근 옹진반도의 향토방위대의 모습이 당시 국방력을 장 상징해준다. 무기가 없어 이렇게 죽창이나마 들고 향토방위에 나섰던 주민들 38선을 지키던 우리의 국군이다. 미군은 철수해버렸고 정부의 계속된 무기 원조 요청도 응답 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달구지로 보급품을 나르던 국군장병, 일선 고지로 공급됐던 주먹밥은 매서운 추위로 굳어 있다.



국군부대를 찾은 연예인들이다. 당시 국군의 병력은 10만 명으로 북괴의 절반이었고 장비는 장갑차 27대 박격포 9백여 문밖에 없었다. 공군은 L4, L5, T6 등 연습용 경비행기 22대뿐이었다. 6.25 발발 한 달 전 남한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 국민이 들떠 있었고 남침준비를 마친 북괴는 6월 7일 남북 총선거를 제의했고 조만식 선생과 남로당의 김선용,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등 위장평화공세를 펴왔다. 정부는 설마 북괴가 남침해 오겠느냐는 안심 속에 6월 22일에는 군의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전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장병들에게 15일간의 모내기 돕기 휴가를 주어 고향에 내려보냈다.



6월에 접어들어 북괴는 기동훈련을 가장해서 38선 지역으로 전 병력을 이동시켰다. 북한 농촌도 완전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38선 상의 북괴군은 6월 23일까지 부대배치를 완료했다. 6월 24일은 토요일,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주말을 맞은 서울의 밤거리는 흥청거렸다. 25일 새벽 정확히 4시 20분 소련제 T-34형 탱크 242대를 앞세운 북괴의 보병 10개 사단 11만 1천 병력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했다. 6월 25일 자 서울의 신문은 괴뢰군이 돌연 남침을 기도했지만, 시내 민심은 지극히 평온하며 전에도 때때로 있었던 한발적인 충돌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휴가와 외출을 나왔던 군 장병들에게 가두방송까지 동원, 원대 복귀를 종용했다. 우리 국군은 전열을 정비했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하에 탱크를 앞세운 괴뢰군 병력 앞에는 너무도 무력했다. 임진강을 넘은 괴뢰군의 1차 목표는 서울이다. 임진강과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자 정부는 대전 사흘 만인 28일 새벽 2시 반 한강대교와 철교를 폭파하고 후퇴했다. 28일 오전 북한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대다수의 서울 시민은 엉겁결에 피난을 하지도 못했다. 북괴 탱크는 지체하지 않고 한강 철교를 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전란으로 등장한 북괴의 불법 남침, 외신은 곧 북괴의 남침을 전 세계에 알렸다. 뉴욕 시간으로 이날 오후 3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합을 갖고 북괴에 즉각 침략행위를 중지할 것과 병력을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마침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관계로 거부권 행사 없이 9:0, 기권 한 표로 채택됐다.



한강 방위선이 무너지자 수원 이남으로 피난민은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전쟁의 비극은 차츰차츰 그 처절함을 더해갔다. 국군은 1차로 안양에서 집결해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요일 새벽을 골라 남침해 온 북괴의 만행에 국민은 정신 차릴 여유도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무조건 남으로만 발길을 재촉했던 것이었다.



미 지상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대전 닷새 후인 7월 1일이었다. 공산군과 처음으로 싸운 것은 미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기동부대였다. 스미스부대는 7월 4일 오산에서 적과 만났다. 그러나 빈약한 무장과 적은 병력으로 북괴 정규군의 화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북괴군의 전쟁준비 정보에 어두웠던 결과였다. 그동안 국군은 평택, 진천, 음성 등지에서 혈전을 벌였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6.25 직후 한국 공군이 미국으로부터 수령한 F-51 무스탕 전투기의 출격 모습이다. 이 전투에서 이근철 비행단장이 전사했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고 7월 10일 유엔의 깃발을 인수했다.



대전,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후퇴하는 국군도 그때그때 재집결,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7월에 접어들며 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피난길은 더욱 고달파졌다. 금강 방위선도 무너지려 하자 대전으로 옮겼던 정부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전도 곧 전쟁터가 된다는 소문으로 피난민들은 대전역으로 몰려들었다.



미 24사단 기갑사단과 대전 전투, 빈 소장이 이끄는 24사단은 대전 사수를 외치며 7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대전에서 시가전까지 벌이며 최후까지 버텨나갔다. 그러나 북괴는 3개 사단 병력으로 대전을 포위, 1개 사단의 미군을 조여들어 갔다. 빈 소장은 스스로 바주카포로 적 탱크를 부수는 등 분투했으나 21일 새벽 5시 대전은 적의 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