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총선거에 이어 8월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4대 대통령에 윤보선 씨를 선출했으며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 책임제의 새 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당시 장면 내각은 신우파의 대립으로 국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고 연이은 데모로 극도의 혼란을 빚어냈다.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박상원 씨는 그때를 돌이켜(박상원 : 그때의 형편과 지금을 보면 지금이 민주주의가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과 같이 자유로운 그런 때가 있었나요?) 혁명재판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은 의사당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신앙촌 박태선 장로교도 천여 명이 동아일보사에 난입하여 파괴와 폭행을 자행한 사건이 터지는 등 무기력 속에 빠진 나라의 형편은 어지럽기만 했다. 이런 혼란으로 공장은 문을 닫고 실업자가 쏟아져 나와 민생고는 극심해져 갔다. 전국 어디서나 데모가 그칠 날이 없었고 하루에 천 건이 넘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는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까지 있었으니 실로 국력의 낭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해 11월 학생들은 남북 학생회담 개최까지 들고 나왔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가자 판문점으로!”라고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북괴에서는 노동자, 농민, 학생들을 군사적으로 편성한 노·농 적의대를 창설했다. 여기에는 18세부터 45세까지의 남자와 18세에서 30세까지의 여자는 모두 동원했고 유사시에는 즉각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철저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북괴를 눈앞에 두고 그때 우리는 데모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새벽 Err_Code(03:29)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따르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보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애국의 피 끓는 우리 국군 장병들은 분연히 궐기했다. 셋째 가난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정비 재건에 총력을 기한다. 당시 육군의 박정희 장군이 지휘한 혁명군은 Err_Code(04:13)에서 당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그동안 불안에 싸였던 국민들은 가슴을 활짝 펴고 혁명군의 거사를 열렬히 환영했다.



5월 18일 정면 내각은 집권 9개월 만에 총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