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낸 장구한 역사의 나라 중국, 이념의 만리장성을 쌓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중국이 이제 새롭게 시작된 자유시장경제의 전장 터에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국의 수도 북경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리고 이념의 장벽 저편에서 반세기의 단절을 겪고도 우리만의 말과 우리만의 웃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들의 낯익은 모습들이 중국대륙에 곳곳에서 변함없이 살아가고 있다. 근대사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의 판도를 뒤바꾸었고 오랜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한국과 중국도 이념의 차이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실로 반세기만에 두 나라는 다시 수교를 맺게 되었다. 80년대 말부터 거세게 불기 시작한 대변혁의 바람이 세계를 양분했던 이데올로기를 깨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교를 통해 이념의 만리장성에 가리워져 있던 우리의 동포 200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세계 유일의 조선족 자치주를 지켜오며 드넓은 대륙에서 당당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약 칠만평방킬로미터의 넓이에 여섯 개의 시와 두 개의 현이 있으며 이곳에 사는 이백만 인구의 40%가 조선족이다. 이곳 연변에도 역시 개방의 바람이 불어왔고 산업화, 공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다. 서울의 축소판이라 불리우는 연길시는 연변의 작은 서울인 셈이다. 이곳에는 다른 나라 동포사회에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이민사의 시조가 되었던 이민1세들의 발자취와 함께 우리 역사가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딜 가든 그 고장을 빨리 파악하려면 시장부터 가라고 했던가. 과연 조선족이 만든 이곳 서 시장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즐비하게 늘어선 낯익은 글씨, 정겨운 간판들, 거리에서 귀를 스치는 우리 맛, 그리고 우리만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시장에 분위기를 더욱 흥겹게 만든다. 맨주먹으로 고국을 떠나 수난의 근대사를 겪었던 조선족이 어떻게 자치주를 마련하고 이렇게 온전히 지켜올 수 있었을까? 마치 불모지를 뚫고 힘차게 뻗어 오른 벼이삭처럼 당당히 살아가는 그들, 황금빛 벼이삭이 춤추는 이 만주 벌판에 그들은 어떻게 흘러든 것일까? 뛰어난 농사기술이 있으면서도 가난했던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만주의 넓은 땅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버려진 땅도 조선족의 손길이 닿으면 훌륭한 논과 밭으로 변했다. 그래서 조선의 소작농들은 봄에 몰래 국경을 넘어 농사를 지어놓고 가을에 가서 거두어 오기도 했었다. 흉년이 계속되던 1860년대, 각종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땅을 찾아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이게 그때 전부 송화강 물로 배타고 다니던 곳인데요. 그래 지금 제방하고 도랑파고 하니까 땅이 됐지. 우리 들어올 때 그때 만들어놓긴 만들어 놔도 물도 안 펐습니다. 우리가 들어와서 수전을 다져놨지, 우리 들어오기 전에 수전도 없었어.”같은 처지에 농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일도 쉽지만은 안았다.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해 놓으면 땅임자가 나타나 땅을 빼앗는 일도 있었고 세를 강요해 머슴살이를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의 땅에 그들은 조선의 농촌 마을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 그것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초가를 엮어 지붕을 얹고 마당 가득 빨간 고추를 널어놓기라도 해야 낯선 타국 땅에서 겪었던 힘겹고 서러운 개척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농민들의 이민은 그 후로도 계속되어 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국권을 잃게 되자 이번엔 항일애국지사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해 이미 조선의 농민들이 모여 살던 만주와 서북간도 땅은 조선인들의 생활 터로 자리를 굳혀갔고 그 중 용정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된다.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독립군에 뛰어 들었다. 이들은 먼저 자리를 잡은 농민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무기를 마련하고 훈련도 받았다. 당시 간도와 만주지방에 사는 조선족의 생활은 대부분 끼니를 잇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농민들은 쌀과 푼돈을 모아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도맡았고 일본군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고 대신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독립운동의 출발은 교육이었다. 이상설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민족교육의 씨를 뿌렸다. 일본이 하나의 학교를 폐쇄 시키면 다른 곳에 두 개의 학교가 생겨났다. 이렇게 조선학교의 수는 늘고 이 교육을 통해 독립군도 배출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들은 만여 명의 조선인들은 용정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격렬한 시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