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에 철의 장벽을 굳게 두르고 있던 소련, 수많은 혁명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세계인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예술을 꽃피우고 첨단과학의 본거지로써 그 자리를 지켜온 소련이 이제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두만강, 1863년 조선의 농가 13호를 태운 배 한척이 은밀히 이 두만강에 물살을 가르며 소련 이민사에 첫발을 내딛었다. 혹독한 세금 수탈로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이 버려진 땅이 많다는 소련을 향해 위험한 이주를 단행한 것이었다. 이민을 엄히 다스린다는 조선왕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통해 포셰트 지방으로 찾아드는 조선농민의 숫자는 속속 늘어만 갔다. 불모지인 연해주를 개발하려던 소련정부는 근면한 조선인들을 환영하고 땅을 대여해주었다. 1869년에 불어 닥친 극심한 흉년으로 대대적인 이민이 이루어졌고 일제에 항거하는 우국지사들의 망명이민도 이어져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신한촌은 독립지사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하얼빈 역에 도착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쓰러뜨린 안중근의사의 쾌거로 용기를 얻어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19년 조선의 3.1 만세운동에 이어 신한촌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인들의 역량이 러시아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제의 복수는 너무도 잔인한 것이었다. 1920년 4월, 신한촌을 기습한 일본군은 조선인의 지도급 인사 300명의 손을 묶어 산채로 집어던지고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잡아 학교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이 일을 4월 참변이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잔악무도한 만행을 하소연할 곳도 달아나 몸을 숨길 곳도 낯선 타국 땅 어디에도 없었다. 조선인들의 피땀이 어린 신한촌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시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첩자활동을 한다는 신문기사가 실렸다.이는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스탈린 정권이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는 일종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들판의 곡식이 누렇게 추수를 기다리고 있던 1937년 가을, 조선인의 마을에는 아무 이유 없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3일안에 간단한 짐을 꾸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앞서 조선인을 대표하던 지도급 인사 2,500명도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지금은 KGB건물의 차고로 쓰이고 있는 이 지하실이 당시 조선인들이 끌려가 취조를 받던 곳이다. 조선인들은 급작스런 명령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불안에 떨며 이 하바로프스크 역으로 끌려나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모스크바를 향하는 세계 최장의 횡단열차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의 20배가 넘는 엄청난 거리를 지금도 종착역까지 1주일이 넘게 달린다.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조선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기차는 객차가 아닌 짐이나 가축 때로는 죄수를 실어 나르던 화물차였다. 급작스런 마을의 출입통제로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한 가족도 많았다. 조선인을 태운 기차는 밖에서 빗장을 걸어 잠궈 마치 달리는 감옥과 같았다. 3일 동안 먹을 식량을 가지고 오라던 명령과는 달리 기차는 한 달이 넘도록 시베리아를 달렸다. 이때 강제이주 당한 한인의 수는 18만 명, 굶주림과 추위가 몰고 온 질병으로 노인과 어린 아기가 하나 둘 씩 죽어갔고 그때마다 기차를 세워 언땅을 파고 시신을 묻어야 했다. 조선인들은 버려두고 온 집과 재산을 생각하며 절망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선각자들이 목숨과 바꿔 지켜 온 학교와 소중한 책들도 모두 잃었다. 황무지였던 땅위를 출렁이던 황금빛 벼이삭을 두고 온지 한 달 만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사람 키만한 갈대가 우거진 중앙아시아의 반 사막지대였다. 그곳에 내 던져진 이들의 첫 번째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땅굴을 파고 갈대를 베어 움막을 지었다.“예전에 우리 살적에 이런 땅굴에서 여기도 이쪽에도 살고 저쪽에도 살고 그리고 어떤 곳은 땅 매꿔서...”

사막의 독충과 말라리아가 또 한 차례 목숨을 앗아갔다.

“굶어죽지, 앓아죽지, ”

그리고 여기 머나먼 중앙아시아 낯선 땅에서 비명에 숨져간 아이들과 노인들의 초라한 묘가 당시의 비참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사람들은 물길을 잡아 운하를 마련하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수저로 막대로 손가락으로 땅을 파고 원동을 떠나올 때 가져온 볍씨를 심었다. 이렇게 땀을 쏟아 부은 지 3년 마침내 버려진 사막의 땅에서 벼가 풍작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3년 만에 벼농사의 성공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