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도 우리나라 사람이 살까하고 갸우뚱해보는 세계지도 속의 그 곳. 그 중의 하나가 열정적인 중남미 대륙이다. 전체 해외동포의 약 2%인 9만여 명이 살고 있는 곳, 중남미로의 이민은 하와이 농업 이민이 시작되던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1,031명의 멕시코 이민이 그 시초가 되었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중남미로 이민 가는 일본인들 속에 소수 한인이 섞인 형태였다. 1953년 휴전이 되고 반공포로 60여명이 남미 국가로 이주했다. 한민족이 처음으로 남미 땅에 둥지를 튼 것이다. 빈털터리로 출발했던 이들은 2, 3년간의 방황 끝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 지금은 대부분 중산층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 남미로의 정식 이민은 1960년대 초반부터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집단 농업 이민이 그 시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 농사 경험이 없는 상태로 도착했던 이들은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오늘 날에는 각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남미의 파리라고도 불리는 초원의 나라 아르헨티나. 한반도의 반대편 지구의 한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덮여있다. 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20여 년 전 쉰 살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 이민을 결심하고 이곳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최재학씨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한 때 공무원, 사업가로 일했던 그는 뒷전으로 물러앉을 나이에 이곳에 건너와 스페인어로 큰 거북이라는 뜻에 그란또르 식품점을 차려 제 2의 인생을 출발시켰다. 이제는 3천 평 규모, 하루 3, 400명의 소매상이 드나드는 대형 식료품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는 최 씨는 유태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통업계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손꼽히는 거상이다. 이곳은 한국인 이민자들이면 누구나 거쳐 가는 109한인거리 109번 버스 종점 부근에 생겨나 자연스럽게 109촌으로 불리고 있는 이민자들의 제 1차 전진 기지이다. 약국, 미용실, 식당 등의 간판이 우리에게 낯익기만 하다. 여느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식료품 구멍가게로 출발한 최 씨의 이민초기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식구들 모두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인내와 끈기로 버텨온 그 세월의 깊이만큼 이젠 기반을 잡았다. 오늘은 최 씨 일가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의 경사가 난 날이다. 최 씨의 차남 재호 씨가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지난 8년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델그라드 법대에서 책과 씨름한 끝에 맺은 결실이기에 기쁨의 크기가 더욱 크기만 하다. 모든 가족, 이웃, 거래처의 관계자들까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며 아르헨티나 식 축하를 나눈다. 이제 최재학씨를 포함한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의 꿈은 오직 하나 바로 2세들을 위한 한국 학교의 설립이다. 2세들이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 땅에 당당한 주인으로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아르헨티나 동포사회에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어린 학생들에게 배움을 전하며 그 꿈을 영글게 하고 있다. 이러한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3월 아르헨티나 동포들의 정성과 모국 정부의 지원으로 현대식 3층 건물에 45개의 교실을 갖춘 한국 학교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날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의 밝은 미래를 향한 문도 무궁화 꽃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활짝 열렸다.이제 구한서 씨에게는 지난 시절이 아득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29의 나이에 이민선에 올라 감자와 소금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생활했던 그는 지금도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10여 년 전 이미 삼만여 평의 농장을 3년 만에 사들였던 구한서씨, 달걀과 병아리 속에 묻혀 살아온 그의 삶 때문인지 가족들은 그를 병아리 아빠, 병아리 남편으로 부른다. 병아리 감별법을 비롯한 새로운 양계기술의 전파와 근면성으로 파라과이 당국은 한국인에게 깊은 호의를 표시하고 있다. 해마다 9월 25일을 양계의 날로 정하고 이 나라 양계업에 끼친 한국인의 공로를 기리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달걀들을 가지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가난한 아마추어 축구팀 선수들에게 후원회장이 되어주었던 그는 그 작디작은 달걀에 자신의 삶의 철학인 인내와 희망을 담아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참으로 막막했던 그 시절 오직 혼자라는 절망감도 그를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힘든 세월을 잘 견뎌 낸 덕분이었을까 그는 브라질 커피의 명산지 로드리나 시에서 최초로 한국인 커피농장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의 집념도 알만하다. 낯익은 벼이삭도 아닌 사과나무도 아닌 열매조차 생소했던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