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한국이란 낯선 이름을 심기에 힘겨웠던 사람들, 그들은 17세기 화가 루빈스의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을 알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탈리아에 이주해 지금도 꼬레아라는 성으로 가문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살고 있는 유럽의 한 곳. 잔다르크가 화형 당했던 도시 르왕에는 역시가 살아있는 듯 진지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한켠에 주위를 훈훈하게 해주는 장작불 같은 사람이 있었다. 어느 청각 장애아들을 위한 임상센터를 운영하는 한국인 김양희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임상센터에는 프랑스 아동의 10 내지 15%가 되는 학습 장애자들이 치료받고 있었다.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겨우 그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다.

“외국 사람이 이렇게 개업을 하니까는 침놓는 의사인줄 알고 침 맞으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또 언어교정을 하고 블란서 학습이니 지능문제에 대해서 제가 간섭을 하니까 이 사람들은 처음에 깜짝 놀랐죠. 외국 사람이 와서 무슨 블란서 말을 가르치냐고 말이에요.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고 성과가 있으니까 병원이 점점 커지고 조수를 차차 쓰게 되고요.”

그가 보살피는 아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도 있다. 힘든 삶을 시작하는 것은 언어장애 아동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피를 나눈 조국의 아이들도 그 곳에서 낯선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그는 파티를 열고 양부모들과 일 년에 한 두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어머니가 있는 조국과의 끈을 엮어서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일주일에 한번 입양아와 몇몇 프랑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김양희 박사. 한글과 함께 한국에 대한 애정 또한 마음속에 담아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였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삶. 그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경희가 여기 13년 전에 왔지”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자 다들 해봐. 하나 둘 셋.“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1990년 10월 동서냉전의 벽을 마침내 허물고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은 같은 분단의 처지에 있는 우리 민족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독일에 뿌리를 내린 삼만 명의 우리 동포들에게는 한없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독일 통일 이후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통일 독일이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에 시사해주고 있는 많은 교훈들을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통일 독일의 선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게 돼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을 앞당기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곳 독일에 한국이라는 낯선 이름이 어떻게 심어지게 됐을까. 위험한 작업 환경과 벅찬 근무시간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오기와 미래의 계획으로 계약기간을 다부지게 꾸려나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의해 오늘날 독일의 한인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폐허위에 경제 재건을 이룩해 라인강의 기적이란 칭찬을 듣고 있던 독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려는 우리에게 독일로의 노동 인력 진출은 국가적으로 해외 진출 외에 개인적 꿈을 일구어 내려는 중요한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독일, 세계의 정치 경제면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경험 때문에 우리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한 재독 한국인들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는 약 칠천 명의 한국인이 정열적이면서도 소박한 사람들과 이웃해 살아가고 있다. 스페인의 제 2 도시이자 1992년 올림픽을 개최했던 바르셀로나에는 한국 스포츠사를 운영하는 도영환씨가 살고 있다. 낯선 글, 낯선 사람들의 나라에서 오직 살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버텨온 지난 10여년. 도씨는 1982년 단 두 대의 재봉틀을 짊어지고 이곳에 인생항로의 닻을 내렸다. 모두 여섯 명이 일하고 있는 그의 상점에는 독립국가 연합 타슈켄트 공화국에서 온 우리 동포 도넬리 아주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이였던 이 곳 스페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절이 바로 그 엊그제 같은데 도시의 가게에는 이제 제법 기반을 잡아 도복의 실밥을 묶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작은 일은 스페인 가정에 하청을 주기까지 한다. 도씨는 오후면 오전 내내 만든 도복을 배달한다. 스페인의 태권도 역시는 마치 한인사와 같다. 스페인 전역에 태권도장이 천여 곳이 있으며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200여 동포 가구가 대부분 태권도 사범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