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란 감성투어 대신 우리에게 들어선 이산이라는 말에 한과 고통이 처절하게 박힌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 그 날 서울에는 피난령이 내려졌고 포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그 높다란 흥남비료공장의 굴뚝을 뒤로 하고 배를 타려는 사람들과 떠나지 못한 사람들로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는 우리 생에 있어 가장 피맺힌 축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4후퇴,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이 노부부가 북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받으며 수백리길 남행에 나섰던 그 때, 그 엑소더스로 해서 우리는 꿈엔들 꿈에 본 꿈속이라며 몽유 속에 해후를 내맡기는 안타까움을 접어갔습니다. 우리를 이산의 시대에 살게 한 원제로써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과 가난, 허무 따위의 암울한 아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Boys be ambitious’라는 권유형 아닌 강요형 문장이 우리의 청춘기를 호도하던 시절 전쟁 통에 잘사는 집 자식들이 유학인내라고 미국으로 많이 달아났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배움 없는 탓을 느낀 젊은이들이 ‘박사 따서 올게요.’라며 유학길에 오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여의도에서 옮겨온 김포 비행장. 모래바람 거칠었던 김포 벌판에는 당시로는 엄청난 환송인파를 뒤로하며 유학길 아닌 고학길 떠나는 43명의 젊은이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트랩을 오르고 있습니다. 요즘 점보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4발 프로펠러 비행기였지만 지금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로 떠나는 자국 국적기 유학생이라고 뽐낼 여유도 없이 그들 박사의 꿈은 기약이 없었고 미군부대에서 10달러짜리 몇 장 어렵사리 구해 건네준 가족들은 떠나보내는 슬픔 위에다 박사의 꿈을 합장백배로 얹어 보냈습니다.
“자기 생활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되기 때문에 또 학비조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공부를 해야 되고 그러니까 효율적으로 짧은 시간을 할애해서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뭐냐 하는 것이 유학생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기술을 배워야 된다 그래서 유학생들 간에 그 배우고자 하는 기술, 인기 있는 기술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발 기술이고 또 한 가지는 소위 그 병아리 감별하는 기술이고 암수를 구분하는 겁니다. 그게 동양 사람들이 손이 자그마해서 그걸 잘할 수 있대요. 그 다음에 이제 그 세 번째가 냉동 기술이었습니다. 제 경우는 냉동기술을 배웠어요.”
그런 한켠으로 빗겨 앉은 군용기 탑승자에는 전쟁이 유산시킨 어린 전쟁고아들이 바구니에 담겨진 채 아무의 전송도 없이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국어 입 열기도 채 못한 채 가지 않겠다는 본능의 울음으로 버둥을 치며 아이들은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