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대회 이렇게

제4편 대회지원

올림픽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주도면밀하게 추진된 행사지원업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도본부 보도위원단과 내외신 지원단 등 3국장 아래 7 처장, 16 부장, 41 담당관의 보도본부가 9월 3일 발단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보도본부 메인 프레스센터는 한국 종합전시장 별관에 설치됐다. 당시 조직위 홍보 보도국장 이재웅 씨의 말을 들어본다. “저희 보도 운영본부는 대회를 취재하는 모든 국내외 기자들을 위해서 최대한의 취재편의와 신속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대회에 대한 홍보 또 나아가서는 국가 홍보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서비스를 하는 것으로 보도운영의 목표를 삼고 있습니다.”



MPC(메인 프레스센터) 내 480석의 공동 기사 작성실은 보도 올림픽의 주경기장이었다. 공동 기사 작성실에는 모니터 TV, 윈스 및 (음성 오류)단말기, 국제전용 전화 등이 설치됐으며 115개 언론사 개별사무실이 임대되어 임시 편집소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회기간 중 6대 통신사에 월드뉴스 서비스를 제공했다. 보도본부는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회견을 주선해주었다. MPC 3층 기자회견장은 6개국어 동시통역시설이 갖추어져 활용되었다. MPC 1층 사진현상소가 코닥사에 의해 설치됐고 니콘사는 사진기 고장을 수리하며 사진기를 대여하기도 했다. 대회기간 27개 경기장과 지방 4개 경기장 및 4개 행사장에 서브 프레스센터가 설치·운영되어 보도진에 큰 도움을 주었다.



IBC 건물은 KBS 본관 뒤편에 1985년에 착공되어 2년 6개월 만인 1988년 6월에 준공되었다. 서울올림픽대회가 임박하면서 모든 조직이 현장운영체제로 전환되면서 8월 17일 서울올림픽 방송본부가 발족, 현장에 배치되어 운영에 들어갔다. 당시 조직위 방송국장 조성민 씨의 말을 들어본다. “올림픽대회 방송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올림픽대회 그 자체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신속·정확하게 보도·중계해주는 통보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올림픽 개최 자체를 가능케 하는 재원조달의...” 방송센터에는 6개 방송연맹을 포함하여 46개국 109개 방송사가 입주하여 프로그램을 제작, 자기 나라에 송출했으며 IBC에는 각종 기능실이 갖춰져 방송인들의 송출업무를 가능하게 했다. KBS가 각 경기장이나 행사장에서 신호를 IBC에 보내면 각 방송사는 해설 음향신호와 영상신호를 혼합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다. 경기장 또는 행사장에서 각 방송사의 개별제작, 취재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해설자석 설치, 카메라위치 지정 등 SPBC(서브 프레스센터) 운영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10,360명의 방송인들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4,000여 명의 방송본부요원이 지원업무를 수행했다. 매일 오전 9시에는 일일 보도브리핑이 시행됐고 인터뷰알선, 뉴스 릴리스, 경기 결과 등이 배포됐다. 그 밖에 포스팅 서비스를 제공, 숙박, 의무, 수송 등을 원활하게 했고 은행, 우체국, 식당 등 각종 편의시설도 제공됐다.



서울올림픽에서 자원봉사자의 활약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모집 캠페인이 벌어졌다. 1985년 10월 5일부터 124개 장소에서 신청서가 배부됐다. 조직위원회는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목적 아래 자원봉사자를 대대적인 모집홍보를 통해 공모하는 방법을 택했다. 1985년 11월 10일까지의 신청자는 11만 6천2백94명이었다. 자원봉사요원은 개인과 단체로 구분하여 4단계로 나누어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최종 2만 7천2백21명을 선발했다. 자원봉사자로서 영예를 안은 이들은 소양교육을 통해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을 쌓아 나갔다. 대회가 열리자 이들 자원봉사자들은 각기 지정된 곳에서 희생적인 봉사활동을 전개, 한국의 자원봉사정신을 뿌리내리게 했다. 각 경기장의 1만 4천4백61명의 자원봉사자가 경기인들을 안내하고 경기운영을 보조했으며 홍보 안내센터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활약한 김연옥 씨의 말을 들어본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무엇인가 참여하고 싶었는데 마침 퇴직공무원 모임인 동호회에서 자원봉사요원을 모집한다기에 선뜻 응했습니다. 저희 단체가 맡은 것은 영접이었는데요. 저는 집에서 가까운 인천항 영접 본부 영어 통역요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88년 8월 2일 근무가 시작되기 한 달 반전이지만 일찍 입국하는 올림픽 패밀리를 위해 저희는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국민적 참여분위기 극대화, 최대 수 국가의 참가, 참신한 국가상의 전파가 홍보의 기본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의 하나로 홍보전시관, 올림픽 기념품 상설전시관 등이 운영됐다. 1982년 6월 한국 종합전시관에서의 홍보전시관 개설을 시작으로 매년 전국체육대회, 소년체전은 물론 국제행사에도 홍보전시관이 개설됐다.



서울올림픽 준비상황 보고회가 시도지역 보고회, 시민설명회 등으로 진행됐다. 시도지역 설명회는 1987년 6월 4일부터 18일까지 14개 시도에서 거행됐다. 외국인을 포함한 시민설명회는 1987년 10월 31일부터 11월 24일까지 실시됐으며 12월에는 각 기관단체에 대한 방문 설명회도 가졌다.



조직위원회는 올림픽 기간 MPC 입구와 각 경기장 주 출입구에 1개소씩 23개 홍보 안내센터를 설치·운영했다. 조직위원회는 홍보 간행물을 국내용과 국외용으로 구분, 국내용은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데에 국외용은 최대 참가를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81년부터 1984년 사이에 화보 등 26종 60만 부, 85년 8종 26만 3천 부, 86년에는 9종 25만 부가 제작·배포됐으며 대회가 임박하면서 종류와 수량을 늘려가며 배포 대상도 확대됐다. 홀 배너, 장식기, 플래카드 등 환경장식물이 경기장을 비롯한 대회 관련 내·외곽에 설치되어 대회의 축제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환경장식물은 작품 경쟁을 통하여 1987년 5월 홍익대학 한덕영 교수팀이 설계용역을 맡았고 9차에 걸친 설계심사를 거쳐 디자인 매뉴얼이 제작·배포됐다. 조직위원회는 서울올림픽 대회의 역사적 중요성과 순수성 및 축제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환경장식의 디자인 방식을 설정하고 세계평화, 화합과 전진의 대회이념을 주제로 표현한다는 구비 요건을 전제로 한 작품 선정에 착수했다. 환경장식물은 섬유처리 장식물, 면 처리 장식물, 구조물 장식, 공간 장식, 시상대, 화훼 장식, (음성 오류)그래픽으로 분류·설치됐는데 설치장소는 도로를 포함한 경기장 34개소, 연습장 72개소, 행사장 76개소 등 182개 장소였다.



서울올림픽은 하이테크 첨단기술의 스포츠 응용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달성했다. 통신 운용에서 전자식 두뇌교환기 6,700회선이 설치됐고 이동통신장비 3,400대가 동원됐다. 무선통신은 무선호출기와 차량 전화 및 휴대용 전화가 이용된 가인 무선통신과 경기 진행 및 행사요원들의 통신 수단인 워키토키와 차량 무선의 전용무선통신이 사용됐다. 서울올림픽에서 음성정보서비스인 오디오팩스의 활용은 하이테크 시설로 서울에서 첫선을 보였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았다. 전광판은 조직위의 연구와 IOC의 자문에 따라 경기장별 종목별로 전광판의 크기와 표출내용 등이 사전에 확정·설치됐다. 경기기록 측정 장비는 1985년 스위스 타이밍사와의 계약에 따라 공급됐다. 서울올림픽에 공급된 측정 장비는 임시장비 139종, 543점과 기존장비 47종, 164점 등 합계 186종, 707점이었다. 각 경기장에 CATV를 설치, 취재의 편의를 제공했고 CCTV가 관련인사와 주요시설물을 보호하는 데 이용했다. 그리고 구내방송과 음향시설도 완벽하게 설치·운영됐고 기상관측업무도 수행됐다. 전산시스템의 운영 (음성 오류)탑인 전산센터가 설치·운영됐다. 한국전력공사 별관 제1전산센터는 경기운영시스템의 주전산기 두 대와 종합정보망 시스템의 주전산기 14대가 설치되어 경기관련 전산시스템을 총괄했다. 이 밖에 대회관리를 위하여 전산시스템이 운영됐다. 대회인력, 입장권 관리, 등록 관리 등이 전산화되어 데이터뱅크와 무결점 시스템을 도입했고 숙박, 수송, 물자, 연습장 관리 등 대회지원업무에 관계되는 각종 통계 역시 전산화되어 한국전산이 개발한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됐다.



올림픽 패밀리와 관중에게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료서비스가 제공됐다. 대회기간 종합병원 규모의 선수촌 병원이 문을 열고 진료를 담당했다. 선수촌 병원은 산부인과를 제외하고 종합병원의 전 진료과목이 포함됐다. 선수단 병원에서는 의사 47명을 포함, 370명이 진료를 담당했으며 진료를 받은 환자는 8,226명에 달했다. 각 경기장마다 68개소의 선수진료실과 관중진료실이 설치·운영됐다. 선수촌 병원이나 경기장 진료실에서는 1차 진료 후 필요한 경우 환자를 후송·조치했다. IOC가 금지한 약물복용 여부를 가리는 약물검사가 도핑컨트롤센터에서 IOC의 의무분과위원 입회하에 실시됐다. 대회기간 중 1,598건의 시료를 채취, 5명의 메달을 박탈하고 5명에게 경고 조치했다. 올림픽 헌장에 따라 여성에 대한 성 검사도 실시됐다. 각종 공해대책이 서울시와 환경청, 보사부 등 관련기관의 협조 아래 시행됐다. 방역활동을 비롯해서 위생 감시원의 배치, 식품취급자에 대한 철저한 건강진단이 실시됐다.



올림픽 패밀리가 입국하여 출국할 때까지 최적의 교통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수송운영단이 설치·운영됐다. 1988년 8월 1일부터 수송운영단 8개 모터콜이 현장 전개됐으며 8월 29일 수송운영단이 발대식을 가졌다. 조직위원회는 수송요원에 대하여 3차에 걸쳐 소양교육과 직무교육, 현장 적응교육을 실시했고 1988년 8월 22일 버스 13대, 승용차 6대가 동원되어 대회 전 종합연습이 실시됐으며 8월 24일과 25일 경기 및 행사 종합연습을 8월 30일에는 개회식 종합연습을 실시했다. 선수, 임원 수송을 위한 선수촌 수송부가 설치되어 참가선수 9,417명과 임원 3,887명을 수송했다. 심판자 1,292명과 IF 집행위원 265명 등 1,557명에 대한 심판진 수송부가 구성되어 활동을 벌였다. 기자촌, MPC, IBC를 대상으로 한 보도진 수송 서비스가 제공되고 귀빈에 대한 수송도 별도로 수행됐다. 이를 위해서 대회기간 중 3,355명의 인력과 2,501대의 각종 차량이 투입됐고 올림픽 패밀리 36,044명을 수송했다. 올림픽 패밀리를 위한 화물수송은 대한통운이 용역계약에 따라 맡아 했으며 지참 화물, 별송 화물, 마필 수송 등으로 분류하여 운송 처리됐다.



서울올림픽의 가장 큰 우려가 안전이었다. 조직위원회는 최적의 안전을 대회 5대 목표의 하나로 정하고 11만 2천9명의 안전요원을 단계별로 현장에 배치하여 참가선수단 보호와 관련시설 안전에 만전을 기했다. 안전 당국의 1차 목표는 공항에서부터 철저한 검문·검색을 실시, 테러용의자의 입국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안전은 264개 관련 시설과 160개국 참가선수단의 경호 업무가 주였다. (음성 오류)등 관련시설의 출입에 철저한 검색이 시행됐다. 자력선 판독장치에 의한 출입 통제가 시행됐고 160개국 선수단과 올림픽 패밀리 등 경호 대상 인원에 대하여 신변보호 전담경호대를 편성하여 신분에 따라 호송 경호를 실시했다. 그리고 시설에 대한 안전관리도 철저히 이루어졌다. 34개 경기장에는 특별한 출입통제가 가해졌다. 등록카드상의 출입특허를 확인하고 자력선 판독선을 거쳤으며 휴대품에 대한 검색이 있은 후 출입이 허용됐다. 경기장 출입 후에는 금속탐지기와 CCTV 등 신형 과학검색장비가 설치되어 위해상황을 즉시 감지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올림픽은 흑자올림픽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수립했다. 3,414억 원이라는 흑자는 조직위원회의 적극적인 수입원 개발과 부단한 노력으로 무난히 달성된 것이었다. 조직위원회의 수입은 방영권 판매 사업부터 시작됐다. 미국 NBC 방송과의 계약체결에 이어 세계 여러 지역과 차례로 방영권 판매 계약을 체결해 나갔다. 판매액에 있어서는 미국 NBC의 3억 달러가 가장 높고 다음은 일본, 유럽, 호주 순이다. 판매 총액은 84년 LA 올림픽 때보다 1억 2천만 달러나 많은 4억 8백76만 3천 달러에 이르렀다. 조직위원회의 수익사업은 광범위하게 추진됐다. 그 가운데에서도 휘장사업에 의한 각종 물품 조달은 막대한 자금 절약을 가져왔고 수익목표 달성, 홍보 효과, 국내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여기에는 142개 업체가 참여했다. 대회기금 수입실적을 보면 9천98억 4천만 원으로써 그 내용은 방영권 2천2백24억 원, 휘장 708억 원, 기념품 37억 원, 기념우표 29억 원, 기념주화·메달 1,352억 원, 광고 265억 원, 복권 1,188억 원, 입장권 275억 원, 입촌비 139억 원, 수입이자·기타 442억 원, 성금·기부금 2,416억 원이다. 개·폐회식을 포함한 서울올림픽 384개 단위 경기에 발행된 입장권 총수는 4백43만 5백5매였다. 개·폐회식 입장권은 1988년 6월 1일부터 15일까지 전국의 외환은행 본 지점과 시군 지정 우체국에서 신청을 접수했는데 평균 31:1의 높은 경쟁률을 나타냈다. 개·폐회식 입장권의 해외 배분량은 원칙적으로 국내와 50:50의 비율을 적용했다. 입장요금 결정에 있어서 개·폐회식은 과도한 구입경쟁과 암거래를 억제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했고 일반경기는 국민들이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낮게 책정했다. 여기에는 또 경기 종목별 인기도와 역대 대회요금, 경기장 위치 등도 고려됐다.



조직위원회는 입장관리에 있어서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좌석배치는 우선 혼란이 없도록 면밀하게 짜였고 경기장 밖에 좌석배열 표지판을 내걸어 입장객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각 경기장의 관람석은 위치에 따라 등급이 결정됐고 등급에 따라 색깔을 달리해서 식별이 용이하도록 했다. 경기장 밖에는 입장객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간이식당을 설치·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