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촌 생활은 공식행사인 개촌식에서 시작됐다. 9월 3일 오전 11시 선수촌 국기 광장에서 이연제 국무총리 등 국내 주요 인사들과 34개국 주한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수촌 개촌식이 거행됐다. 식은 조직위 위원장의 인사말, 국무총리 축사, 선수촌 시장의 개촌 선언, 삼군 의장대에 의한 참가국 국기게양 순으로 진행됐다. 선수촌 운영에 투입된 인원은 조직위 직원 57명, 지원 요원 2,468명, 자원봉사자 2,473명, 단기 고용 59명 등 모두 5,057명이었다. 이들은 1987년 1월부터 단계별로 배치됐다. 조직위는 이들에 대한 철저한 사전계획을 실시했다. 1단계 소양교육은 1987년 10월과 11월 2차에 걸쳐 실시됐고 2단계 직무교육은 1988년 4월부터 9월까지 4차에 걸쳐 실시됐다. 특히 해외동포 통역요원에게는 1, 2차에 걸쳐 6일간씩 숙식을 함께하며 업무 일반은 물론 생활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육이 진행됐다. 1, 2단계의 교육을 받은 인원에 대하여 3단계 현장적응 교육에 들어갔다. 평가단이 교육상황을 수시로 돌아보며 문제점을 시정해 나갔다.



입촌식 행사에 앞서 운영요원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연습이 실시됐다. 실제 행사와 똑같은 연습을 반복하면서 미비점을 계속 보완해 나갔다. 선수촌 운영과 시설에 대한 평가단의 점검이 실시되어 최종 마무리작업이 진행됐다. 출입안전에 대한 시범훈련이 실시됐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진화, 인명구조 등 안전시범훈련도 실시됐다. 선수촌 입촌자의 진료활동은 물론 각 경기장 진료소 등에서 후송되는 환자에 대비한 훈련이 개원되기 전 수시로 있었다. 개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운영요원들의 일손도 한층 바빠지고 있었다. 거듭된 훈련의 결과 선수를 맞이할 모든 체제가 착실하게 잡혀갔다. 선수촌 시설을 보도진에게 공개하는 행사가 9월 1일 선수촌 국기광장에서 열렸다. 오전 11시부터 열린 이날의 공개행사에는 국내외 보도진 200여 명이 참석했다. 보도진은 식이 끝난 후 선수촌 안의 각종 시설을 돌아봤다.



9월 5일 아일랜드 선수단 일행 23명이 서울올림픽 공식 1호 입촌식 거행국이 됐다. 입촌식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 먼저 NOC 국가연주와 함께 국기가 게양되고 선수촌 시장의 환영사와 선수단 대표의 답사가 있고 선수촌 측이 마련한 기념품 증정으로 진행됐다. 입촌식 순서는 각 NOC의 입국사정을 감안하여 조직위와 협의, 날짜를 잡았으며 1회에 5개국이 함께 할 수 있게 했다. 입촌식에서 축제의 행사가 펼쳐지기도 했다. 뉴질랜드는 그들의 민속무용단이 민속춤을 추며 입촌을 축하했다. 입촌식이 가장 많았던 날은 9월 15일로 이날 하루에 35개국이 입촌식을 가졌다. 9월 5일부터 9월 20일까지 선수촌 국기광장에서는 58회에 걸쳐 입촌식이 거행됐다. 늠름한 한국 선수들의 입촌식도 있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승리의 결의를 다졌다.



선수촌은 크게 숙소지역과 국제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식당, 편익시설, 오락시설 등이 국제지역에 배치되어 선수들 생활에 최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선수촌 식당은 4,200여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현대식 시설로써 각 선수단의 지역,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서 국제적 메뉴의 식사를 5일 주기로 제공했다. 대회기간 중 선수촌 식당에서는 빵 558톤, 쌀 33톤, 각종 고기 310톤, 과일 400톤, 우유 3억 밀리리터 등이 소비됐다. 그리고 선수촌 내의 우체국, 전신전화국, 사진현상소, 미용실, 은행 등이 널리 이용됐다. 오락실은 언제나 젊은 선수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쇼핑센터, 세탁소, 항공안내소도 설치되어 선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탁구, 당구, 헬스클럽 등은 가벼운 운동과 오락, 체중조절에 이용됐다. 경기 동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CATV룸도 설치·운영됐다. 선수촌은 여기 입주한 선수들의 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위원회는 선수촌 생활 전반에 대해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선수촌 내의 모든 시설은 바로 이들을 위해 있었고 이 시설 속에서 세계의 젊은이들은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선수촌의 날이 밝는다. 선수들은 제각기 경기장으로 향한다. 선수단을 위한 셔틀버스가 운행되어 수송편의를 제공했다. 선수들은 선수촌에서 경기장 간 34개 노선과 연습장 82개 노선에 운행된 셔틀버스가 주요 운송수단이었다. 선수촌은 안락한 도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산뜻한 보도, 곳곳에 쉴 수 있는 공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단은 이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선수촌은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 충분한 휴식요건 조성, 최상의 신체조건 유지, 친목과 화합분위기 도모, 최상의 안전을 목표로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선수촌 본부는 생일을 맞은 선수와 임원들에게 케이크와 선물을 전달하여 축하해주었다. 또한, 선수촌 본부는 각국 국경일에 경축 화환을 전달하는 등 축하행사를 열어주었다. 선수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촌내에 종교관이 개설·운영 됐다. 천주교관, 기독교관, 불교관, 이슬람교관, 그리스정교관, 유태교관이 각기 의식을 가졌다.



선수촌에서는 대회기간 중 다양한 문화예술행사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9월 16일 올림픽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전야제 행사가 벌어져 퍼레이드, 민속무용 아리랑 한마당 쇼가 진행됐다. 이 밖에 세계의 돌 축제를 비롯해 10월 2일 환송의 밤 행사까지 13차례에 걸쳐 문화행사가 베풀어졌다. 그리고 아시아의 밤 등 지역적으로 구성된 특별공연도 3차례에 걸쳐 열렸다. 9월 25일 한국의 3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을 맞아 선수촌에서는 갖가지 민속행사가 베풀어져 외국선수단에 한국의 민속을 소개했다. 추석절 공연축제는 25일 오후 7시부터 약 3시간에 걸쳐 올림픽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특히 그네타기에서는 한국인의 묘기에 감탄을 보내는가 하면 처음 타보는 외국 선수의 서툰 솜씨에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옛 그대로 실현된 전통혼례식은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집중시켰다.



대회기간에 맞춰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을 방문한 귀빈들이 빠뜨리지 않고 선수촌을 방문, 자기 나라 선수단을 격려했다. 선수촌 귀빈 방문은 모두 197회 3.470명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정치, 종교 지도자 등 여러 인사들도 방문했다. 그리고 외국 귀빈으로는 스웨덴의 카를 구스타브 국왕과 노르웨이 브란츠란트 수상 등 정상급 귀빈들이 다녀갔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환송의 밤이 열렸다. 짧고도 긴 선수촌 생활 그리고 선수촌 구석 속에 뿌려진 아름다운 추억들, 그 선수촌을 떠나는 젊은이들은 만남과 헤어짐의 어려움을 달래며 선수촌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선수촌과 나란히 선 기자촌, 대회기간 중 이 기자촌의 생활도 선수촌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기자촌 SPBC에서는 직접 서울의 소식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다. 종합안내 센터와 전신전화국 등 보도지원시설과 함께 기자회견, 인터뷰 알선 등 취재활동에 도움을 주었고 각종 편익, 위락 시설을 갖추어 입촌한 보도진 111개국 5,186명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자촌 식당은 보도진의 취재활동을 고려하여 식사시간대를 넓혀 잡았고 식단 구성도 세계 일류에 맞추도록 했으며 종류도 환자식을 갖추는 등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급식 운영업체로 선정된 호텔 신라와 롯데는 (음성 오류)를 만들어 기자식당, 프레스 그릴, 스낵바의 세 종류로 나누어 운영했다. 기자촌의 편익 위락시설은 아파트 지하주차장과 상가건물을 활용했다. 모든 편익시설이 선수촌과 다름없이 갖추어져 입촌자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서비스가 제공됐다. 기자촌을 떠나는 보도진 모두는 어느 역대 올림픽에서도 볼 수 없었던 훌륭한 기자촌 운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