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대회 이렇게

제6편 각종행사 및 대회평가

서울올림픽의 문화예술 축전은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화해와 전진을 구현하는 범세계적이 축제행사로서 8월 17일부터 10월 5일까지 50일간 계속되었다. 국내외 예술단체 469개, 28,831명이 참가한 문화예술 축전행사는 경축행사, 공연행사, 전시행사 등 3개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공연행사는 전통예술, 무용, 연극, 음악, 영화 등 각 부문에 걸쳐 다채롭게 펼쳐졌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외국인들이게 한국의 전통예술을 소개하는 대한민국 국악제가 국립극장에서 펼쳐졌다. 서울국제음악제, 기념음악회, 세계합창제, 서울국제가요제로 나누어 진행된 음악축제에는 총 2,432명이 참가하여 36회의 공연을 가졌다. 서울국제연극제는 국내 극단 13개 단체와 외국 극단 6개 단체가 참가하여 8월 16일부터 10월 2일까지 국립극장, 문예회관 등에서 공연됐다. 서울국제무용제에는 국내 11개 단체와 미국, 헝가리, 소련 등 6개국의 세계적인 무용단이 참가하여 8월 21일부터 10월 5일까지 53회 공연에 794명이 출연했다. 특히, 궁중의상을 비롯한 고전의상 쇼는 한국 고유의상의 멋과 특징이 돋보여 외국 여성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전시행사는 세계 현대 미술제, 한국미술전, 한국문화제 특별전 등 5개 분야 24건이 열렸다. 올림픽 기념종합전은 세계 아동미술전을 비롯해서 각국의 특징적인 전시물이 선을 보였다. 그리스 스포츠 유물전, 이탈리아 유물 특별전, 스포츠 미술 공모전은 보는 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한국 전통 자수매듭전과 한국 전통 복식 이천년 전은 외국인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국제스포츠 우표전 등 이 모든 전시행사는 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의의가 있었다.



서울올림픽 공원을 세계 최고의 예술 조각공원으로 조성하여 후세에 길이 빛날 문화유산으로 남기려는 세계 현대미술제의 핵심적인 행사가 국제 야외조각심포지엄이었다. 여기에는 현존하는 세계 정상 조각가 가운데 엄선된 31개국 35명의 조각가가 참여했고 이들은 1, 2차로 나뉘어 직접 한국을 방문, 공개리에 작품을 제작했다. 1차 심포지엄은 1987년 7월 3일부터였고 2차 심포지엄은 1988년 3월 11일부터였다. 서울국제학술회의는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몸과 마음과 지성이 삼위일체의 제전을 펼쳤다는 데에서 뜻이 크다.



학술회의는 1988년 8월 21일부터 19일간 (음성 오류)아카데미와 각 대학에서 세계적인 석학 29개국, 87명과 한국학자 15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가 열리는 동안 세계 43개국의 청소년들이 모여 일류평화에 기여하는 정신과 우의를 다졌다. 9월 15일 오후 8시부터 청소년 캠프의 시작을 알리는 캠프 개회식이 박세직 조직위 위원장과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등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참가 자격은 18세 이상 22세 이하로 제한되어 있으며 참가 인원은 한국 221명, 외국 661명 등 모두 882명이었다. 개회식에 이어 한국의 전통무용이 공연되자 세계의 청소년들은 환호와 함께 모두가 하나가 되어 청소년캠프의 개막을 축하했다. 캠프기간 이들에게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가 베풀어졌다. 개·폐회식에 초대되어 올림픽의 주행사를 참관하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경기참관이 주선됐다. 1인당 10매의 입장권이 제공됐는데 총 입장권 배부수가 1만여 매를 넘었다. 운영본부에서는 캠프 참가자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와 발전된 한국의 모습을 알리기 위하여 1차로 9월 16일 서울시내, 민속촌, 삼성전자를 관광토록 했다. 그리고 9월 20일에는 13개국 84명이 서울대학교를 방문하여 도서관과 학교시설을 견학했다. 33개국 379명의 참가자들이 9월 17일부터 2박3일간 한국가정 340세대에서 생활을 같이 하며 한국을 익혔다. 아마추어 무선인 HAM이 운영되어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었고 만남의 광장에 설치된 낙서판은 서로 우의를 다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500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과 각종 편의시설도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자기 나라의 의상과 예의범절을 소개하는 민속의상축제와 참가국 고유의 민속 문화를 발표하는 각국의 날 행사를 열어 문화교류의 장을 이루었다. 10월 1일 폐회를 앞두고 그동안 캠프생활로 서로 낯익은 얼굴들이 석별의 정을 나누는 우정의 밤을 끝으로 청소년캠프는 막을 내렸다.



이렇게 서울올림픽 대회는 스포츠 행사뿐만 아니라 문화올림픽으로서의 문화예술축전과 국제학술회의 그리고 세계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청소년 캠프 등 그 모두가 세계의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완전을 추구한 기획이 완전의 결실을 맞는 순간 세계는 이 대회를 들어 올림픽 사상 유례 없는 훌륭한 대회였다고 평가했다.



결국, 서울올림픽 대회는 5대 목표인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 최대의 절약을 여지없이 달성, 우리의 저력을 과시했고 5대 특징인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을 훌륭하게 실현했다. 대회 기간 중 외국 기자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에 대해서 중진국 이상이 85.3%, 좋은 인상이 87.2%, 장래가 밝음이 89,8%, 서울올림픽에 대한 평가에서 경기시설 훌륭히 79.8%, 신변보호 만족이 80.2%, 시민들의 친절이 78.9%, 서울올림픽의 영향에 대해서 경제발전 89.1%, 국제적 지위향상이 88%, 정치발전이 68.4% 등 대체로 80% 이상의 높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온 세계의 매스컴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높이 평가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서울올림픽 성공’이라는 사설에서 2주일간의 경기가 끝나자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은 잘한 일이었음이 입증됐다고 했다.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올림픽은 훌륭했다.’라는 사설에서 서울에서의 사상 최대의 스포츠 제전은 대성공이었다. 분단국가에서 테러사건도 없이 평화리에 끝났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한국인들 승리감 만끽’이라는 기사에서 세계무대에서 별로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나라인 한국이 이제는 더 이상 간과되어 질 수 없는 나라임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프랑스의 르 몽드는 ‘올림픽폐막 금메달 한국’이라는 기사에서 이번 올림픽은 민주화 과정에 있어 경이적인 분기점을 이룩했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고 했다.



1989년 4월 11일 청와대에서 유공자에 대한 포상식이 있었다. 박세직 조직위원장, 김용래 전 서울시장, 김옥진 사무총장 등 13명이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이어 청와대 녹조원에서 이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열렸다. 정부는 체육훈장 119명을 비롯해서 근조훈장 81명, 공로장 195명 그리고 대통령 및 국무총리 표창 768명 등 총 1,163명에게 포상했다.



1989년 4월 3일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연회가 창설된 지 7년 5개월, 대회 종료 6개월 만에 해산하게 됐다. 이날 해산식을 끝으로 조직위의 모든 공식 업무는 종결됐으며 1989년 10월 2일까지 민법상의 청산 법인으로서만 존속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청산 법인으로서의 조직위는 법인소멸 등기절차 이행 등 업무를 수행하고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던 88올림픽의 위대한 흔적을 남겨둔 채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1989년 4월 20일 서울올림픽 기념 체육진흥공단이 서울올림픽의 영광과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탄생했다. 체육진흥공단은 앞으로 국민생활체육의 확산과 체육단체의 재정자립지원, 청소년 건전육성자금지원, 우수체육인 양성 등 사명을 완수할 활력이 기대된다.



우리가 이룩한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올림픽정신에 충실한 동서화합의 대회로 평가될 것이며 우리 민족에게는 개국 이래 최대의 행사를 훌륭하게 치른 빛나는 업적으로 남게 됐다. 우리는 대회를 유치한 81년부터 7년여 동안 갖가지 장애와 난관을 뚫고 조직위원, 운영위원의 불굴의 의지와 국민들의 성원 그리고 국제적 이해와 지지에 힘입어 자랑스러운 성공 올림픽의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