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엄동설한 좋은 날씨에 점심밥을 먹고 오는 것이 아까워 부녀자들을 통해 들에 밥을 날라 먹으며 일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에 불이 붙듯 부락 공동작업도 불이 붙기는 힘들어도 한번 불이 붙으니까. 그 힘은 무섭게 번져나갔습니다. 청년회는 산에서 돌을 날라 산둑을 쌓고 모든 주민은 길 만들기에 동원되었습니다. 정말 온 동민이 하나가 되어 결사적으로 일했습니다. 나는 마음마저 숙원해지고동장과 주머니를 털어 막걸리나 사서 동민의 노고를 위로해 주는데 그쳤습니다. 우리가 낸 구호비로 문성동민은 앞장을 서며 도박풍조를 없앴으며 남에게 한 푼의 원조도 없이 가난한 농민의 주머니를 털어 일을 해 나갔습니다. 나도 몹시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중고품 오토바이를 하나 샀습니다. 노름으로 재산만 날리던 내가 좋은 일을 한다니까. 내 처가 방앗간 일을 해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서슴없이 사 주었던 것입니다. 일은 얼마든지 하겠다.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만 도와 달라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때로는 너무 벅찬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민의 정성에 정부도 소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사업에 영일군에서는 35톤의 시멘트와 군수가 앞장서서 기술지원까지 해 주었습니다. 농노건설 하천지원제방보수와 함께 다음에는 담장보수와 지붕개량사업입니다. 나는 지붕위에 슬레이트의 외상 얻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전국 안다녀본 회사 없이 찾아가 사정을 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한일 슬레이트 회사에서 1년 외상의 슬레이트를 계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값으로 기와모양의 슬레이트를 샀습니다. 호당 평균 3만원어치가 되는 데 농촌 경제형편으로 한 번에 지출할 수는 없고 계약 때 1만원 보리타작 때 1만원 가을추수가 끝나면 전부를 주기로 한 것입니다. 나는 좋아할 부락민의 얼굴을 생각하며 운전석을 재촉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30평의 마을회관과 폭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천호와 1600미터의 농로도 반년 만에 완성시켰습니다. 몇 천 년 묵은 초라한 농촌모습을 말끔히 씻어 내린 것입니다. 바로 1년 전 가뭄에 콩 나듯 기와집이 보이던 문성동 모습 이제는 듬듬이 보이는 초가집이 몹시 흉하게 보입니다. 물론 이런 초가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공동우물 부엌개량 공동빨래터 등 생활환경을 개선하는데 모든 일에 미쳤습니다. 문성동은 이제 환경개선과 함께 농가소득면도 몇 년 전 집단이농민이 생겼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높아졌습니다. 즉 1967년도 30만의 양수기를 70년에는 100마력으로 증설 30정보의 천수답을 완전 수리안전답으로 바꾸었고 1967년 먹을 양식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던 12정보의 논을 과감히 논밭으로 바꾸어 1970년에는 270만원의 수익까지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양계도 67년 300수에서 70년에는 6500수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성동에는 양송이 재배사업을 유치하여 지붕개량으로 남는 짚을 값비싸게 팔게 되고 여기 취업해서 노년의 수입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경상북도 내에서 제일 못살았던 문성동 과거 10만원내외였던 문성동이 이제 소득도 그 두 배인 23만원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일을 합니다. 앞으로 뒷산 1천 정보를 밤나무단지로 만들고 마을 앞 하천에 제방을 쌓아서 물길을 바로잡고 7천보의 하천부지를 옥토로 바꾸어 1975년에는 농가소득을 41만5천원까지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문성동의 성공사례는 기계면 전체에 파급이 되었습니다. 나는 더욱 바빠졌습니다. 별로 머리가 좋지 못하던 내가 면전체일에 골몰하다보니 그저 좌왕우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고를 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좀 더 차분하게 계획하며 일해야 되겠습니다. 아니 밀려오는 파도처럼 겉잡지 못하게 펼쳐진 기계면 전체의 의욕에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